상실

by 순임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함께 장남이 남겨두고 간 아이를 키우게 된 할머니,

바로 아빠의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미안해해야 할 사람.

할머니와의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어. 아빠와 엄마의 빈자리를 메꾸려 할머니는 무던히도 애쓰셨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나는 할머니의 눈물버튼이었지. 누가 툭 하고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설움을 각자 껴안은 채 우린 그렇게 살아갔어. 엄마가 그리운 것도 아빠가 보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흐느낌으로 잠에서 깨는 밤들이 많아졌지.

매일 아침 내 긴 머리를 정성 들여 땋아주던 엄마의 손길이 사라지고 등굣길에 자전거를 태워주던 아빠의 든든한 뒷모습이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췄어. 내 하늘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내 긴 머리는 가위질 몇 번에 사정없이 잘려나갔지. 여자애도 남자애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낯선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말, 그때 참 많이도 듣고 살았다, 아빠.

어린 마음에 그런 말 들으면 내가 아빠를 죽게 한 거 같아 괜히 아빠한테 미안해지고 살아있는 게 뻔뻔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위로랍시고 건네던 그 말이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한 말이었어. 목숨만 붙어있다고 다 살아있는 게 아니거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남은 가족의 삶도 죽은 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데 말이야. 정신이 죽어있는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지. 그래서 위로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닌가 봐.



세월이 조금씩 흐르고 선명했던 슬픔은 조금씩 옅어져 갔어.

나도 점점 커가고.

죽은 사람은 그렇게 또 잊혀가는 거겠지.

그래서 불쌍하다고 하는 걸까?

우리 불쌍한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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