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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안 Oct 07. 2024

반달가슴곰씨. 잠 깨워서 미안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기 위해선 동트기 전

그곳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홀로 묵고 있던 숙소에서 그곳까지는

차로 두 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고

그 지역 역시 초행길이었다.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고자

알람을 맞춰두었으나 잠은 도무지 오지 않아

결국 이리저리 뒤척인 채

새벽이 되었다.


간단한 간식거리와 텀블러에

뜨거운 차를 담고서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초행길인 데다 깜깜한 새벽인지라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겨우 네비에서 안내해 주는 대로

길을 따라갔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여 달린 

네비는 좌회전하여

국도로 나를 안내했다.


국도는 지도상 표시되어 있는 곳보다

더 구불구불했고

어둠으로 인해

시야로 가늠할 순 없었지만

꽤 높은 산들을 여럿 타고 내리면서

깊이깊이깊이 들어가는 듯했다.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하자

새벽 5시 반이 되었다.

차 한 대 주차되어있지 않은 그곳에서

목적지까진 30분 정도

산길을 걸어야 한다 했다.


가로등하나 없는 깊은 산길을 나 혼자서..

이제 어쩌지?

두려움이 잠시 일긴했으나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려

배낭을 어깨에 걸치고 혼자 산길을 올라갔다.


가로등 불빛도 없고

내 주위 일 미터 근방 너머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운 산길을

혼자 걸어갔다. 핸드폰 라이트에 의지하면서.


새벽이라

숲 속 모든 생명들은 깊은 잠이 들었나 보다.

내게 들리는 소리라곤

내가 걷는 산길을 따라 내 옆으로

돌돌 흐르는 계곡소리뿐

고요했고 긴장감 있는 산행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역시 예상대로 그곳엔 나 혼자였다.

물안개를 보기엔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한 게 분명했다.


어둠 속

물이 고여있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동그랗게 감싸며

높게 서있는 산 실루엣이 느껴졌다.


저수지를 감싸고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더듬더듬 걷다 보니

물가로 내려가 경치를 볼 수 있는

전망대  데크가 눈에 띄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간 데크 앞

가까이엔 아주 오래된

오백 년은 족히 넘었다는

왕버들 나무 고목이

밑동을 저수지 수면 밑에 담그고 서 있었다.


저수지 물속에

서있는 고목 왕버들나무  군락들.

나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홀로 어두운 밤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짙은 어둠 속에서

드디어

왕버들나무 할아버지와 마주 섰다.


저수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둘러서 있는

산 언저리에는

여직 초승달과 개밥바라기 별이 떠 있었고,

그 검푸른 빛으로 인해

산능성이를 따라 선 나무들 형체들이

안정감을 주었다.


잎사귀를 다 떨군 채로

두꺼운 가지들만 뻗은 채 서있는

나이 많은 왕버들나무는

이리저리 뒤틀린 형체가 보일 듯 말 듯 했고

한편으론 어둠 속에서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전망대 데크 위에서

나무를 한참을 마주하고서서

바라보다가

나는 데크에 마련된 좁은 벤치에 앉았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고

들고 내쉬는  내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평생 경험한 것 중

가장 완벽한 고요였다.


그 깊은 어둔 숲 속

깊숙하게 자리 잡은 저수지 가에서

수백 년 동안 자리를 지킨

고목나무 할아버지마주하며

 나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숲의 소리에

 기울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참방.


무언가 수면 위로 가볍게 뛰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아직 동면에 들어가지 않은 개구리가

이른 방문객으로 인해 놀라 잠을 깨

물속으로 뛰어든 걸지도 몰랐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개구리에 뒤이어

물새나 야생오리가 물에 뛰어든 듯

낮고 조용하게 잘박 잘박 물소리가 났고

날개 짓을 몇 번 퍼덕퍼덕하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자그마한 소리를 들으며

그것들이 움직이면서

내 곁에 머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잠시 일었던 두려움이 가시고

기분 좋은 평안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눈을 감고 고요한 숲의 소리를 느끼다가

눈을 들어 새벽하늘을

ㅡ거의 밤하늘에 가까운ㅡ

바라보니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서

촘촘히 빛났다.


오리온별자리를 비롯해서

이름을 알 수도 없는 별자리들과

희미하게 무리 지어 하늘을 가르는 은하수까지,

그쯤 되자

나는 이른 새벽 어둔 숲 속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이 겁이나기보다

이러한 경험을 해볼 수 있다니!

이건 엄청난 행운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의 어둠도

저수지의 고요함도

개구리가 헤엄치는 자그마한 소리도

물새의 작은 움직임소리도

새벽하늘의 초승달과 별들의 빛남도

모두 오롯이 내 감각을 위해

그 시간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고요함의 절정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서

오직 내게 허락된

완벽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즐겼다.


그 순간들이

나를 충만하게 채우고 만족스러워지자

다소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핸드폰에 저장된 내 음악 리스트 중

가장 좋아하는 곡 하나를 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분명 음악을 켜는 순간

그 고요함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테지만

이미 나는 그것을 충분히 오감으로 느낀 후였기에 조금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곳엔 나 혼자였고

그 시간과 장소는 이미 오직 내 것이었으니.


핸드폰 플레이리스트를 고민하며 고르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인

프랑스 뮤지컬 십계의 테마곡

L'Envie d'aimer (사랑하는 마음)

선택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 곡이 왠지 그곳에 잘 어울릴 듯했다.


아주 작게 볼륨을 맞추었으나

간주가 시작되자

음악은 웅장하게

데크에서 저수지 수면 위로 퍼지고

동그란 저수지를 따라선

주위 산들 위로 퍼져나가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

위로 위로 위로

나선형을 그리며 날아 올라갔다.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나는 눈을 감고서

산과 물과 나무와 별들과

하나가 된 채

사이좋게 음악을 나눠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장소와 소리들과 냄새와 공기를

항상

언제나

어디서든 기억하게 되리라고.


내가 있는 데크 뒤쪽에

서있는 산 정상 어디쯤에선가

음악소리에 잠을 깬

반달가슴곰

ㅡ주차장에서 저수지로 올라오는 산길

중간중간에 있던  현수막이 읊기를!

(반달 가슴곰 출몰 조심!)이라 했는데

유추해 보건 그 소리는

거기서 서식하는 반달가슴곰이 분명해 보였다.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꿱꿱 울었다.


조심스레 볼륨을 낮추긴 했지만

음악소리는 저수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선

산들을 타고 울려 퍼져

 속에서 깊은 잠을 자는 녀석을

깨운 게 분명했다.


녀석 울음소리가

누가 내 잠을 방해해?!

이 시간에 미친 거야? 하듯

다소 신경질적으로 느껴졌다.

번뜩

그 녀석이 잠을 방해한 나를 찾아서

따지기 위해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고 소심한 나는 진심 겁이 났다.


음악은 후반부 간주 중이었고

이제 마무리하는 부분이었기에

반달가슴곰씨가

내게 수면 방해 소음을 따지러 산을 내려오기 전에

음악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한편으론

나는 내 앞에 물 위에 몸을 뒤틀고 서있던

오백 년 왕버들나무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개구리와

물새와

반달가슴곰과

소리내진 않았지만

잠결에 그 음악을 들었을 무수한 숲 속 생명들에게

얘들아.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야.

너네들과 같이 들어서 참 기쁘다.

라고 생각을 했다.


초승달과 별들이 하늘에서 물러나고

푸른빛이 돌더니

이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물속에 여기저기 자리 잡은

왕버들나무들이 그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고

숲은 조금씩 자기의 본 색깔을 드러냈다.


물새들은 하나둘 깨어

물 위를 가르며 헤엄치고

내 뒤 숲 속에선

부지런한 새들이 깨어나 날갯짓을 했다.


평화롭고

고요하며

무엇인가가 나를 충만하게

위로하고 보듬으며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조안 앤더슨이 쓴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라는 책중에

딱 그 구절처럼

나는 완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홀로 있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평온함을 맛보았다.
조안은
'혼자'라는 그리스어의 뿌리가
'모두 하나다'라고 말했었다.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 중에서
ㅡ조안 앤더슨 ㅡ


홀로 있음으로써

완전한 만족감과 평온함을 느꼈고

혼자였지만,

혼자였기에

내 주변 숲 속 생명들과 함께

모두 하나가 된  멋진 경험을 했다.


날이 밝아지자

하나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저마다 작품 사진용 비싼 사진기를

둘레 멘 사진작가들이었는데

그들도 분명

나처럼 새벽 물안개를 보고자

저수지를 찾은 사람들이었으리라..


숲의 고요함이

그들도 인해 부산스러워지자

나는 물안개를 보진 못했지만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떴다


물안개보다도

더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해

내  오감 속에 잘 쟁여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평생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용기를 내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깊은 주왕산 골짜기에 사는 내 친구들에게

사랑 담은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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