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한 대형병원의 면접장에서 대표님이 말했다. 난 그곳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그는 내 자소서의 독자(讀者)였다.
자소서의 정석은 '지원하는 회사의 요구사항에 맞춰 자신의 경험과 강점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그런데 난 자소서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적는다. 이야기는 찾아온 기회들과 내가 내린 결정들로 말미암은 '인과관계', 그리하여 이 회사에 지원하게 됐다는 게 결론이다.
이런 자소서에는 호불호가 있다. 슬쩍 보면 장황하고 자세를 바꿔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채용 담당자의 반응은 전자다. MBTI로 본다면 'T의 성향'으로 자소서를 평가한다. 그래야 정시 퇴근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난 여전히 '내 이야기'를 쓴다. 면접관이 독자(讀者)이길 바라며.
한편으로 나도 자소서를 받아보는 면접관이다. '이야기가 있는 자소서'를 선호하는.
30대 초반부터 팀장을 해온 덕에 내 면접을 거친 이는 백 명이 넘을 것이다. 난 그들의 자소서를 꼼꼼히 봤다. (때론 야근도 불사하며) 일하는 이로서 기(신입), 승(주임, 대리), 전(과장급 이상)을 보고 그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함께 일하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상상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자기소개서들이 기억에 남는다.
A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친 뒤 휴학, 제주도에 있는 한 부동산 개발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 상가의 입주 정보를 알리는 '블로그 운영'을 담당했는데 인턴에게 얼마나 기대를 했겠는가. 블로그도 의무방어 정도로 운영하는 채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블로그로 상당한 입주 신청자를 모아버렸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인턴 성공 신화'는 흥미로웠고 덕분에 그녀를 채용했더니 ‘역대최강인턴’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정직원 한 명분 이상의 일을 거뜬히 해냈다.
B는 중학교를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나 열심히 노력한 끝에 유명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많은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유학생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허상이란 걸 깨달았다. 인종차별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취업에 걸림돌이 됐다. 그녀는 뜻 맞는 유학생들과 연대하고 다양한 직군의 유명인사들까지 섭외해 졸업 후 한국에 취업하려는 유학생들을 위한 취업박람회를 성공리에 개최했다. 역시 채용한 결과 인턴의 업무 역량과 태도에 대한 내 선입관을 깨는 데 한몫을 했다.
자기소개서에 오로라를 보기 위한 여정을 적은 경력자 C도 있었다. 그녀는 전 직장 퇴사 후 버킷리스트에 있던 캐나다 오로라 여행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느낀 점을 적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실행력을 강조했다. 역시 채용했으며 그녀의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게다가 꼼꼼한 업무진행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이들과 함께하는 직장생활은 즐겁다. 그들의 삶은 목표와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내 첫 자소서는 아예 픽션이었다.
정기구독하던 문화 매거진에 기자 아카데미 모집 공고가 올라왔을 때였다. 제출할 서류는 자소서, 기사 형식의 글이었다. 난 편집주의 독특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소서를 고민하다 전에 적어놓았던 픽션 한 편을 골랐다. 그리고 이 문장을 서두에 덧붙였다.
'1인칭 주인공 시점 픽션의 주인공에는 자가의 꾸밈없는 본성이 반영됩니다.'
그때부터 내게 자소서의 장르는 '맥락 있는 이야기'였다.
40대의 막바지에도 자소서를 쓰곤 한다. 취업 포털에 올리고 활성화시키면 헤드헌터들이 읽었다는 메시지가 날아온다. 하지만 적잖은 나이와 이직 경력들 때문인지 그들은 내 자소서에 대한 감상문을 보내지 않는다.
소설은 작가의 풍부한 경험과 원숙미가 소설의 가치를 올린다. 하지만 자소서라는 장르는 반대다. 나이 든 작가, (이직) 경험 많은 작가의 자소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몇 년 전, 자소서의 스토리텔링을 칭찬한 대형병원 대표님의 소감에 기뻤고 얼마 전 내 자소서를 읽고 어떻게 전공과 취향과 경력이 따로 놀 수 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보인 어느 회사 이사장님의 멘트에 신나서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지만 대다수 면접관들은 자소서를 열심히 읽지 않는다. 그게 이 이야기를 적게 된 계기다. A4지 한 장의 자소서로 어떻게 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실제 자소서를 목차로, 내가 일을 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틈틈이 적어보았다.
짧은 자기소개서도 안 보는 면접관들이 이 글까지 보겠냐고? 내게 제1의 독자는 50대가 되어있을 미래의 나 자신이다. 나이의 앞자리 4에서 5로 바뀌는 건 좀 슬픈 느낌이다. 50대의 나에게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소서와 그 맥락을 뒷받침해 주는 이야기들을 선물하려 한다.
그래도 내가 또다시 취업포털에 자기소개서와 이 링크를 공유했을 때, 시간 혹은 관심이 아주 많은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 온 한 사람의 20년 동안의 이야기를 기꺼이 감상해 주면 감사하겠다.
마지막으로 50대의 나에게 이 말을 남긴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