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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7. 2024

'열심히'라는 단어의 힘

우연을 감당한다는 것

우연에 나를 맡기니, 1999년 8월 도쿄에 와 있었다. 


나리타 공항의 문을 나서자 낯선 해송(海松) 향이 훅 밀려들어 '다른 곳'이라는 게 실감 났다. 전철과 택시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쿄 북부 우키마후나도(浮間舟渡)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기독교계 워킹홀리데이협회에서 저렴하게 제공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12개의 2인실 방과 공동 식당, 샤워실이 있었는데 입주자는 대부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일본에 머무는 한국인이었고 두 명의 일본인도 있었다. 

주변에는 세상에 필요한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 작은 공장들이 여럿 있어 낮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매미 소리 사이로 윙윙거리는 기계음이 심장박동처럼 끊김 없이 들려왔다.


기자 아카데미는, 성실한 활동을 약속하고 이어갈 수 있었다. 해결할 건 생계를 위한 구직이었다. 


숙소 사람들은 일이 일본어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일본어가 익숙지 않으면 과묵하게 전단지를 돌리고, 생활 회화가 된다면 식당(주로 불고기집이며 남자는 철망 설거지, 여자는 서빙)에서 일하며 능숙하면 사무직 알바도 구할 수 있다. 입주자 대부분은 중간 수준으로 오전에 일본어 학교에 갔다가 오후엔 몇 시간 식당이나 PC방에서 일한 뒤 저녁에 귀가했다.   

 

이들의 전통에 따르면 난 전단지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를 찾았다. 그래야 더 흥미로운 기사를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런 성격이기도 했다. 20대의 내 신조는 무려 '무개성 몰가치'였다. 


그래서 구직이 늦어졌다. 두 번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거쳐 통장 잔고가 심히 불안해질 무렵에야 운 좋게 공장 일을 구했다. 일터는 더 북쪽으로, 전철을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30분을 가야 하는 '건축 재료 재활용 공장'이었다. 그곳에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한 달 만에, 도쿄에서의 일상이 시작됐다.




공장에선 스티로폼 같은 재활용 쓰레기들은 분쇄된 뒤 다양한 배합의 5kg~20kg 제품이 되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를 향해 변함없는 속도로 행진해 온다. 나는 (정말) 재빨리 뾰족한 도구로 제품들에 통풍 구멍을 송송 뚫고 같은 종류의 제품을 2개~4개씩 바인딩 기계로 묶어 한쪽에 던져 놓는다. 제품이 꽉 차면 기계를 멈추고 (정말) 재빨리 제품들을 창고로 가져가 쌓는다. 


일을 시작하고 두어 번 공장의 기계가 꿈에 등장했다. 악몽이었다. 그만큼 기계가 주도하는 무표정하고 변수 없는 일의 속도가 육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줬다. 여름의 막바지였고 에어컨 없는 공장 안은 항상 먼지로 자욱해 하루종일 마스크를 써야 했다. 


일주일 만에 고비가 왔다. 

한국에 놓고 온 '대학생'이라는 안락함이 그리웠다. '그냥 전단을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견딜만하니까 다들 하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난 원래 같은 회사의 시멘트 공장에 채용됐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한 한국인 청년이 일을 했는데 너무 일을 잘해서 그가 그만두자 회사는 또 한국인을 원했다. 그런데 이 재활용 공장에 갑자기 결원이 생겼다. 시멘트 공장은 사람이 많았지만 재활용 공장은 소수 정예라 이탈의 여파가 훨씬 컸다. 그래서 난 급히 재활용 공장으로 오게 됐다고 한다.  


나를 이 공장으로 이끈, 즉 다음 주면 그만둘 일본인 청년 A와 잠깐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서핑을 좋아하는 30대 초반의 프리타였다. 일 년에 3~4개월 서핑을 하기 위해 나머지 시간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체구는 작지만 체력이 좋아 같이 일을 하면 큰 덩치로 허덕이는 내가 부끄러웠다.    


"일이 힘드네요.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이에요. 그쪽은 전혀 힘들어 보이질 않던데 혹시 비결이 있나요?"


"난 무적의 서퍼라서요. 하하~ 그리고 3개월 정도 이 일을 했으니까 초보인 그쪽한테는 익숙해 보이는 거고."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그냥 열심히 해봐요."




'열심히'라는 말, 일본어로 '잇쇼켄메이'라 발음하고 '一生懸命'라 쓴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 이 단어는 이질감이 들었다. 한자만 보면 '목숨 걸고'라는 비장함을 풍기는데 그냥 '열심히'라는 일상어다. 그래서인지 그가 심드렁하게 말한 '열심히'가 내겐 '이왕 시작한 거 한 번 죽어라 해봐'라고 제멋대로 해석됐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만났던 우연들을 행운으로 결론 내리기 위해선 분명 '감당의 시간'이 존재했다. 시멘트공장에서 이곳으로 경로가 변경된 것도 사실 큰 행운이었다. 난 그냥 '열심히' 감당해 보기로 했다.  


그날 퇴근길에는 신선한 초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뜨겁던 여름은 맞은편 전철처럼 서둘러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몇 달이 흘러 맞이한 겨울에 난 공장에서 '치카라 모치(力持ち)', 즉 '장사'라는 별명으로 붙이고 있었다. 부실한 식사와 일상이 된 노동 탓에 몸무게가 20kg이 빠졌다. 그래서 이 별명은 뭔가 아이너리했다. 


일본에서의 노동자 시절, 룸메이트와 함께(오른쪽이 나)


숙소에서는 생전 처음 차압딱지를 경험했고, 갈등이 있던 룸메이트가 한국으로 떠난 뒤 전단지를 돌리는 친구와 새로 한 방을 쓰게 됐다. 퇴근길 동네 공원에서 마주치던 고양이들은 날 피하지 않고 당당히 먹이를 요구했으며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에 도쿄 구석구석을 걸어서 탐험하다 보니 거대한 이 도시와의 서먹함도 조금은 사라졌다.


열심히(一生懸命) 살았더니 우연은 행운이 되어갔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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