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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7. 2024

불량품의 가치

감상적인 일본 공장 이야기 1.

어렸을 때부터 '공장'을 동경했다.


극장에서 본 <대한 늬우스>에서는 항상 공장과 여성 공원들이 등장했고 그녀들이 만든 제품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줄줄이 행진하며 '풍성한 우리나라'라는 이미지를 주입했다. 이 씬이 존재하는 의도가 뭐였든, 덕분에 어린 난 공장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마법 같은 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며 느낀 공장의 이미지는 '건조한 논픽션'이었다.




수제 구두 공장에서 일주일 동안 일할 기회를 얻었다. 

숙소 친구들 몇 명과 맡은 일은 완성된 구두의 최종 품질 검사였다. 우리는 구두 상자들이 가득한 창고에서 박스를 열고 서너 개의 완제품 구두를 샘플로 꺼내 꼼꼼히 살폈다. 몇 백 개의 상자들이 우리 손을 거쳤고 시간이 지날수록 창고 한편에는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구두들이 쌓여갔다.


일을 하다 시선을 올리면 조그만 창 너머로 '김정일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 건물 어딘가에 조총련 사무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덕분에 일터는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 한국에선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니까. 

한편으로는 살벌한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아 게으를 수 없었다. 


창고엔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었다. 중국인들이었고 그들은 쉼 없이 수다를 떨었으며 말의 속도와 일의 진척은 반비례했다. 




약속한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다. 마지막 일이 끝나고 우리는 수당을 받기 위해 관리자 주변에 모여들었다. 50대로 보이는 반들반들한 대머리의 관리자는 과묵하던 그간의 이미지를 벗고 조금 수다스러워졌다. 흘낏 주위를 살펴 중국인 그룹이 아직 오지 않은 걸 확인한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러분(한국인)은 정말 작업이 빠르고 정확했어요. 저들(중국인)과 작업량에서 차이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선물을 주기로 했어요. 나갈 때 저기서 원하는 신발을 한 켤레씩 골라가세요."


그의 손끝은 우리가 골라냈던 불량품 더미를 가리켰다. 


사실 '불량의 사유'는 대부분 경미한 흠이었다. 만일 매장에서 디자인이 정말 맘에 든 신발을 발견했는데 내 사이즈 상품이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면, 적어도 난 제값에 구매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의 기준에서 그것들은 명확한 불량품이었다. 


난 높은 통굽의 여성용 갈색 롱부츠를 골랐다. 요즘 TV에서 이런 스타일의 신발을 착용한 연예인들을 여럿 봤기 때문이다. 


건물을 나서며 맞은편 건물 옥상의 김정일 초상화에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 




집에 오는 길, 전철역에서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담배 불을 붙였다. 손에 든 구두를 보다 숙소에 있는 일본인 R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곧 생일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설렜다.  


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 중간쯤부터 걸음이 느려졌다. 


'이 신발, 내 기준에선 괜찮지만 공장의 품질 검사 기준에선 분명 불량품이지.'


이 불량 신발의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난 담배를 한 대 더 필 수밖에 없었다. 결론을 내린 걸음을 돌려 다시 전철역으로 향했다.


'치즈 케이크라도 하나 사야겠다.'


불량 구두는 결국 한 켤레 몫을 하지 못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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