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영상엔 방진복을 입은 작업자가 자랑스럽게 둥근 반도체 웨이퍼를 들고 있는 장면이 꼭 등장한다.
덕분에 내게 방진복은 '첨단 산업'의 유니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도시락 공장에서 일을 하기 전까지는.
방진복으로 몸을 감싼 뒤에는 에어샤워실로 들어간다.
에어샤워실이란 문과 문 사이의 협소한 공간인데,
공장에 들어가기 전 말하자면 통과의례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이곳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먼지를 제거하게 된다.
철두철미하다.
양손을 들고 빙빙 돈 다음, 마지막으로 몸을 탁탁 턴다.
약 십 초 후 바람이 멈춘다.
그러면 출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가면 거기가 바로 공장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중
내가 들어간 1990년대 끝자락의 에어샤워실은 하루키가 묘사한 19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어샤워실 출구를 나서자 서리 내린 늦가을 대지처럼 차갑고 넓은 공장 내부가 펼쳐졌다. 유부 냄새가 낮게 깔려있었다. 이곳은 내가 5일 동안 체험한 도쿄의 두 번째 공장이었다. 방진복을 입고 반도체의 웨이퍼가 아닌 도시락을 만드는 곳.
편도 두 시간의 출퇴근 거리가 부담됐지만 통장 잔고가 심각한 표정으로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종종 편의점에서 사 먹던 도시락의 생산 과정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게 기대를 품게 했다. 또 이곳에서의 체험을 기자 아카데미에 보낼 기사로 쓴다면 '야쿠자' 같은 소재보단 훨씬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닐까?)
"이곳은 다이에 호크스(현재의 소프트뱅크 호크스) 야구단 구장에서 판매되는 도시락을 만드는 곳입니다."
입장 전 로봇처럼 각진 얼굴의 공장 직원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공장에 들어가 보니 내부는 정말 야구 경기두 게임을 한꺼번에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첫 출근길에 상상했던 '아기자기'한 편의점 도시락 공장 이미지는 순식간에 만루홈런을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갔다.
공장엔 여러 개의 독립된 라인들이 바코드처럼 줄지어 있었다. 한 라인에선 김밥과 유부초밥이, 또 다른 라인에서는 여러 반찬들이 담기는 세트 도시락이 생산되는 식이었다. 한 라인 당 8명이 팀을 이뤄 공정의 각 단계를 담당했다. 나와 중국인 4명, 브라질인 2명, 일본인 한 명으로 구성된 '국제연합 도시락팀'은 김밥과 유부초밥 라인을 맡았다. 난 공장 전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우리 라인은 하루 종일 중국어와 브라질어(포르투갈어)로 왁자지껄했다. 일본과 브라질의 관계는 돈독하다. TV에서는 브라질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오고 도쿄에서 열리는 가장 큰 축제(마츠리) 중 하나는 바로 삼바축제였다. 그래서 도쿄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중국인들 중 소란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키 작고 활기찬 한 청년이었다. 그는 함께 일 한 지 이틀 만에 내게 소개팅을 제안했다. 그것으로 그의 진정성은 급락했다.
소란함 속에서도 라인에서는 하루 종일 김밥과 유부초밥이 끊임없이 생산된다. 사람을 개의치 않는 벨트의 일정한 속도 덕분이다. 사람들의 손은 그 속도만큼만 분주하다. 포장을 비롯해 유부 안에 밥이 잘 들어갈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준다거나 둘둘 말린 김밥이 잘 썰어지도록 위치를 잡는 일, 그리고 간혹 나오는 불량품을 걸러내는 건 자동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몫이다.
이렇게 도시락 왕국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일하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점심 도시락은 다른 곳에서 오는 왜소한 상품이다. 절임 반찬 몇 가지, 생선구이 한 토막, 된장국 조금, 밥 조금, 조금조금조금...
부실한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하다 보면 오후 4시쯤 극악스러운 시장기가 찾아온다. 난 혈기왕성한 스물일곱 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은 한 곳에 쌓인 불량품으로 향했다. 말이 불량이지 실수로 유부가 약간 찢어졌거나 김이 잘 말리지 않은 김밥이다. 3일째, 불량품을 향한 내 불량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일본인 팀원, 주부 M은 유치원생 딸이 좋아하는 거라며 사탕 하나를 건네줬다.
공장을 나서면서 두 시간 후, 숙소 근처 우키마후나도역 앞 슈퍼마켓에서 펼쳐질 배고픈 자의 축제, '타임세일'을 떠올렸다. '거기까지만 가면 나는 살 수 있다.'
올라탄 전철은 덜컹덜컹 북쪽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났다.
도시락 공장에서의 마지막 날이 왔다.
이제는 중국어와 포르투갈어, 오후의 공복감과 M이 건네주는 사탕,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조금은 편안하고 심지어는 소중히 느껴졌다. 겨우 일주일 만에 익숙해진 건가.
오후가 되자 공장 안의 공기가 휙 바뀌었다. '정'직원들이 환호성이 들렸고 분주하게 이동했다. 일을 마친 뒤 방진복을 벗고 나와 공장의 출구에 섰을 때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시락 공장의 주인, 다이에 호크스가 무려 리그 우승을 했다!
공장에서는 기념으로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크게 선심을 썼다. 출구에는 그날 공장에서 만들어진 김밥과 유부초밥이 질서 정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불량품도 아니었다. 각국 노동자들은 모여들어 김밥과 유부초밥을 입 속에 욱여넣었다.
나 역시 '우리'가 만든 유부초밥을 흡입하다 M을 발견했다. M은 잠시 망설이더니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김밥과 유부초밥 몇 개를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나는 4시의 사탕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조용히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날 알아본 M은 깜짝 놀라더니 비닐봉지를 닫지도 않는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방진복을 입은 공장 안에서의 관계는 방진복을 벗은 순간 끝.'
단기 알바생인 내 머릿속에선 그런 문장이 떠올랐다.
공장을 나서는데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난 다음 시즌도 다이에 호크스가 우승하길 기원했다. 방진복을 입은 누군가는 그제야 자신의 손으로 만든 김밥과 유부초밥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간바레, 다이에 호크스!"
일본의 프로야구 구장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