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가 극성던 7월의 어느 금요일 밤, 소파에서 선잠이 들었던 난 가위에 눌렸다.
첫 투자제안서를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받아 그랬나 싶었다. 물 한잔 마시고 자야겠다 싶어 일어나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 이불을 펼쳐 나를 끌어안았다. 직감적으로 첫째라 생각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의 방에서 게임을 하며 친구들과 디스코드로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았다.
'누구지 이놈은?'
점점 묵직해지는 그 존재를 버티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다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먼저 첫째의 방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다. 게임에 열중하던 첫째는 진땀 흘리는 아빠를 흘낏 본 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너, 너... 지? 아빨 덮친 게!"
"노노, 나 계속 게임했음~"
"아빠 가위눌렸어! 누른 건 너였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긴 하더라. (피식)"
"야~ 그럼 깨워야지!"
식탁에서 냉수 한 모금으로 찐득한 가위의 여운을 털어내고 있는데 첫째도 물을 마시러 왔다. (흠칫) 밤 12시. 야행성 가족에게 지금은 초저녁이었다.
"다음부턴 끙끙대고 있으면 가위눌린 거니까 깨워줘!
"응, 근데 가위가 뭐임?"
"꿈을 꾸는 시간은 자는 시간의 20% 정도 되는데 그때 뇌는 눈꺼풀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네 몸을 꽁꽁 묶어놓는대. 꿈속에서의 행동을 현실에서 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조건 하에서 네가 꿈을 깼는데 몸은 여전히 묶인 상태, 그게 가위야. 정신은 꿈과 현실 중간에 있고 듣고 볼 수 있는데 말을 할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거지." (* 정설은 아니다)
"오~ 설명충 아빠. 근데 그 상태를 빨리 끊어버리고 싶어 가위라고 하는 거야?"
"그것까진 모르겠다만... 그나저나 바둥거렸더니 허기지네. 엄마는 자?"
"응. 피곤하대."
"아들... (엄마도 잠들었으니) 라면 하나 끓여봐."
"오케~"
(잠시 후)
'후루루루루룩~ 후루루루루루루루룩~'
아빠와 아들은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MSG향과 면 치는 소리에 둘째도 등장했다.
"나도!"
이렇게 금요일 밤, 세 부자는 엄마 몰래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었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를 두드리던 나는 아들들에게 뜬금없는 화두를 던졌다.
"여름밤이네? 가위눌린 기념으로 무서운 얘기 한 판 해줄까?"
웹툰 작가를 꿈꾸는 둘째는 괴담을 사랑한다. 아이는 작은 보조등만 남긴 채 불들을 죄다 끄고 오더니 조용히 외쳤다.
"시작해 보시던가."
"귀신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어.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응?" "엥?"
"20대의 막바지, 기자였을 때, 여름 납량특집을 진행한 적이 있거든. 아빠가 담당한 아이템은 바로 귀신 인터뷰 시도기였어."
"인터뷰면 인터뷰지 왠 시도기?"
"아, 담당한 코너 콘셉트가 그거였어. 임파서블 인터뷰! 인터뷰가 안 되기로 유명한 사람에게 인터뷰 섭외 도전하기! 그리고 납량특집 인터뷰이는 바로 귀신이었지. 아빠는 대학생 기자 후배들과 함께 움직였어."
귀... 귀신님 인터뷰 함 해주시면 안 될까요? _ 둘째 아들 손그림
"먼저 도시괴담 전문가를 만나봤어. 결과적으로 딱히 얻은 게 없었지. 그는 오히려 귀신을 믿지 않았거든. 그가 말하길 도시괴담이라는 게 유사 공포, 즉 있을 법한 얘기로서 즐기는 장르기도 하고, 사회적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했어. 예를 들어 너희들은 알지 모르겠지만 홍콩할매, 입 찢어진 귀신 이런 괴담들은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라', '성형수술을 과하게 하지 말아라', 이런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이야기라는 거지."
"아!"
"공동묘지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어. 무섭긴 했는데 뭔가를 만나진 못했지. 다음으로는 분신사바를 시도해 봤어. 밤 12시 넘어서 종이와 펜을 준비한 세 명이 모였지. 장소는 종합병원의 어둑한 비상계단이었어. 원래 학교나 병원처럼 낯엔 사람이 많다가 밤이면 텅 비는 장소가 음기가 강하다고 들었거든. 우리는 촛불을 켜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었지. 그리고 O와 X를 적은 종이 위에 세 명이 펜 하나를 잡고 귀신에게 질문을 했어. 귀신님, 이 자리에 있어요? 하고."
'꼴딱(침 삼키는 소리)'
"그런데... 펜이 움직이는 거야! X로."
"X? 귀신이 여기 없는데 어떻게 대답을?"
"멀티 뛰나 보지. 여튼 우린 잔뜩 긴장해서 빨리 끝내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지. 인터뷰해 줄 수 있는지. 그랬더니, 또 펜이 움직이는 거야."
"어디로?"
"X로!"
"그 귀신 까칠하네."
"세상에! 이젠 귀신한테까지 인터뷰를 거절당한 건가? 우린 맥이 빠지고 무섭기도 해서 슬금 병원을 빠져나왔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일행 중 한 명이 너무 무서워서 빨리 끝내려고 몰래 힘을 줬대. X가 나오게."
"결국, 포기?"
"마감 때까지 포기란 없지! 이번엔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기로 했어."
"전문가?"
"무당!"
"아빤 대학교 때 신촌에 자주 갔었는데 신촌역 근처에 G백화점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옆에는 지하 1층 높이의 넓은 땅이 위가 뻥 뚫려 노출되어 있었어. 그곳엔 포장마차들과 점집들이 잔뜩 자리를 잡고 있었지. 듣기만 해도 음기가 느껴지지? 평소에 포장마차를 오가다 눈여겨보아 오던 무당집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갔어. 무당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어. 울긋불긋 민화 같은 게 가득 그려져 있는, 전체적으로 붉은 기운이 도는 공간이었어. 무당은 여자분이었는데 얼굴에 바비 크림을 바른 것처럼 윤기와 광택이 흘러넘쳤지. 무엇보다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이었어.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 그런데 딱히 새로운 답을 얻을 수는 없었어. 밤 12시에 여러 명이 동시에 염원을 하면 만날 가능성이 크다나? 인사를 한 뒤에 떠나려다 아빤 일행을 먼저 보내고 다시 무당에게 갔어. 그리고 취재비로 나온 돈을 주며 점을 봐달라 했지. 평소에 무당은 점을 어떻게 봐주나 궁금했거든."
"취재비 횡령인가?"
"잠입취재야!"
"이미 기자라고 다 말했다면서."
"여튼! 시작됐어. 그런데 무당이 자꾸 허공과 대화를 하는 거야. 무서운데 궁금해서 혹시 저 옆에 누구 계시냐고 물어보니 자신이 모시는 신 이래. 어! 여기 귀신이 있는 거야? 그럼 무당을 통해 귀신과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거잖아! 라 깨달았지만 그럼 너무 재미가 없으니 계속 점을 봤지. 그런데 묻더라. 여자친구가 아프지?라고."
"뭐야? 아빠 설마 여자 친구도 있었어?"
"그땐 있었다고! 무당은 여자친구가 무려 죽을병에 걸렸대. 소름이 돋았어. 정말 언젠가부터 여자친구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거든. 병원에서는 정확한 이유도 모르고. 아빤 어떻게 하면 여자 친구 병이 나을지를 물었지. 속으로는, 이거 부적 쓰라고 하는 거 아냐? 비싸게? 얼마나 원할까? 같은 생각을 했어. 그런데 무당은 여행 가면 꼭 그 지역의 절에 가서 탑을 돌며 여자친구의 쾌유를 빌래. 진심으로 그러면 된다고. 그리고..."
"또 뭐랬는데?"
"아빤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이래. 어째 아빠한텐 두 명 몫의 운이 있다고. 대신 여자 친구는 운이 정말 없다고."
"그렇게 운이 좋으면 로또나 사보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탑을 돌았어?"
"응. 그 뒤로 취재나 여행으로 지방에 가면 무조건 근처 절에 들러 열심히 탑을 돌았어. 당장 효과가 있진 않았지. 결국 여자 친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어. 아빤 더 열심히 빌었지. 그런데 정말 두어 달 뒤 여자 친구의 건강이 호전되기 시작했어. 이게 고향과 가족이 준 안정감 덕분인지, 아빠의 치성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아빤 후자라고 봐. 그리고 아빤 여자 친구에게 말해버렸어. 내가 운이 좋은데 너한테 다 준다고."
"그래서 아빠가 지금 이렇고,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구나. 왜 그랬어! "
"아닌데? 운이 좋으니 너희 같은 아들들도..."
'퍽!'
삼부자의 수다에 시끄러워 잠이 꺤 아내의 등짝 스매시가 작열했다.
"몇 신데 아직도 안 자고, 게다가 돼지 삼부자가 라면까지!"
아들들은 화제를 돌려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엄마! 아빠가 예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한테 운을 다 줘버렸대. 빨리 다시 받아오라 그래!"
나는 등짝의 고통을 참으며 절규했다.
"얘들아. 그때 그 여자 친구가 바로 너희 엄마야!"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