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다이빙하기
21세기를 맞고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기보단 네이버와 다음이 문화계의 인력들을 '수집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종이 잡지를 만들며 주기적으로 만나던 음반사 담당자들, 후배인 해외 매거진 에디터 등등의 고별인사를 접하며 나는 종이 위에 머물러도 될까라는 고민을 한참 했다.
결국 나 역시 디지털 세상으로 떠났다.
이직한 A사는 유명한 디자인 에이젼시였다. 만년 막내 기자였던 30대 초반의 난 A사의 디지털사업부 과장이 되었다. 급하게 퇴사를 하며 내가 채용될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전임자는 오프라인 카피라이터 출신이었는데 그녀는 다시 오프라인으로 복귀했다. 여러모로 힘들었다는 말을 남기며.
여태껏 사용해 본 프로그램은 아래한글뿐이었고, 스토리보드도 asp, jap라는 개발 언어도 플래시와 HTML 각각의 장단점도 알 리 없는 내게 디지털은 그저 신세계였다. 텃세도 있었다. 종이 잡지를 만들던 사람이 난데없이 과장으로 온 데 대해, 특히 개발팀의 반발이 컸다.
난 개의 친 않았다. 내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왜 그런가요?"였다. 순수하게 궁금했으니까. 그곳 사람들에겐 서른이 넘어서, 모르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알려달라고 도움을 구하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나와 회의를 하면 자신이 인터뷰이가 된 것 같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결과적으로 내 그런 태도는 조직에 융화되는 데 한몫을 했다.
첫 프로젝트는 항공사의 온라인커뮤니케이션이었다.
항공사는 연령, 탑승기록, 마일리지 현황 등으로 고객을 세분화한다. 그리고 각각의 타깃에 맞춰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펼친다. 온라인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는 그 전략의 실행을 위해 운영됐다. VIP 고객을 위한 종이잡지를 발행했고 젊은 층을 위해서는 웹진을 만들었다. 세분화된 고객 그룹별, 언어별로 매달 20여 종의 뉴스레터를 보냈고 공항과 기내 등에 비치되는 전단의 기획과 디자인을 맡았다. 같은 회사의 타 사업부에서는 이 항공사의 기내지를 제작했다.
이 중 웹진은 특별한 스토리텔링 미디어였다. 세계관은 '카메라군'이라는 주인공이 악당에게 납치된 그의 여자친구 '폴라로이드 양'을 쫓아 세계(라고 하지만 사실 항공사의 신규 취항지)를 누비는 모험이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알아보니 '여행 콘텐츠+항공 정보'라는 차별화하기 힘든 틀에 갇혀있을 때 한 디자이너가 회의 중 연습장에 끄적인 카메라 머리의 사람 캐릭터를 본 팀장이 이 '카메라군'의 모험으로 스토리텔링 웹진을 제안해 보자고 했단다. 이 웹진은 새롭고 매력적이어서 꽤 많은 마니아가 있었고 어워드에서 미디어 분야 대상 등을 수상했다.
디지털 전환기다 보니 기업들은 고객들에게 제공하던 종이 사보를 웹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의 사보 회사들이 여전히 주도권을 잡고 이 변화를 맞이하다 보니 웹진들은 하나같이 좌측에 목차를 두고 우측에서 콘텐츠를 보는, 전자책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심지어는 종이 사보의 PDF판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면서 '웹진'이라 부르기도 했다.
'종이잡지를 그냥 웹으로 옮기면 디지털 미디어가 되는 걸까?'
열심히 질문을 하면서 디지털적인 관점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된 난, 이런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조금 다른 디지털 콘텐츠를 기업들에 제안하기 시작했다.
* 이동통신사 아웃바운드(국내 고객이 해외에서 사용하는) 로밍 블로그
외계인 노민이 한국의 우수한 로밍 기술을 빼돌리기 위해 이동통신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다! 스토리텔링을 강화하기 위해 외계인 노민의 엉뚱한 매력을 보여주면서도 서비스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부의 이야기를 전하는 웹툰과 함께 키워드를 잡기 위한 독자 참여 여행 콘텐츠, 그리고 실제 고객의 서비스 관련 질문에 개성 있는 캐릭터로 응대하는 김대리 코너로 구성된 블로그.
* 멀티플렉스 브랜드의 콘텐츠 코너
탐정 최기봉이 극장의 서비스에 적용된 다양한 기술들과 따끈따끈한 신작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파헤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최기봉 캐릭터가 인기를 끌며 연말에는 최기봉의 복장(트렌치코트)을 한 신입사원을 고객들이 극장에서 찾으면 선물을 주는 '최기봉을 찾아라' 프로모션이 펼쳐지기도.
* 캘리포니아 관광청 미디어 '호텔 캘리포니아'
캘리포니아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호텔 '호텔 캘리포니아'에는 필립 고든이라는 주인장이 머물며 한국에서 여행 온 다양한 인물들을 맞이한다. 손님들이 캘리포니아에서 겪은 에피소드들과 덕분에 맞이하는 내적인 변화들을 액자식 구성으로 보여주는 온라인 미디어인데 게스트북에는 이 호텔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으로 알고 예약 문의를 하는 글들을 종종 올라오곤 했다.
기존 웹진에 비해 이들 디지털 미디어들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온라인에 어울리는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기업이 알리려 하는 내용들을 맥락에 맞게 배치해 고객들에게 브랜드의 정보를 자연스럽게 소화하도록 한 것.
(2) 고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3) 영상, 음악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특히 호텔 캘리포니아의 경우, 현지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관광청이 보유하고 있는 올드팝 음원들을 스토리의 BGM으로 활용해 그 지역의 감성을 최대한 풍부하게 전달했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 냐짱 지역의 대형 리조트를 운영하던 한 대표님이 찾아와 호텔 캘리포니아 덕분에 미국에서 생활할 때의 향수에 잠길 수 있었다며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디지털 미디어를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견적이 맞지 않아 불발이 됐지만...)
그렇게 난 디지털이라는 커다란 변화에 적응해 갔다.
모르는 걸 알기 위해 질문을 잘한다는 건, 변화무쌍한 세상을 잘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기술이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