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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7. 2024

포도밭을 일구는 콘텐츠

브랜드와 고객이 만나는 '진실의 순간'을 기획하기

"오늘 밤 안으로 제안서 하나를 완성해야 해요."


파견팀 PL(Project Leader)은 회사에 오자마자 다급하게 얘기했다. 


C사의 통합멤버십 론칭 서비스 사이트 구축 프로젝트를 어렵게 수주했다. 회사에서는 파견팀을 꾸려 TF에 합류시켰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메인페이지 디자인 시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응원차 파견팀을 방문했을 회의실 한 편에 시안 출력물들 매달려 '디자인의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일정에 대한 위기감에 TF는 긴급회의를 열어 원인을 분석했다. 결론은 '콘텐츠가 없어서'였다. 시스템과 사이트를 구축하는 TF는 진즉 가동됐는데 마케팅 TF는 출발 전이었다. 그래서 시안들에선 콘텐츠 없이 더미를 얹은 UI만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니 컨펌이 될 리가 없었다. 


"회사에 콘텐츠 하는 팀이 있는데..."


파견팀의 말을 들은 TF의 클라이언트 측 담당자는 먼저 프로젝트 전체를 총괄하는, 즉 시안을 컨펌하는 상무님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내일 오전밖에 안 되겠는데요?"


그래서 PL은 내게 퇴근하지 말라고 전화를 한 뒤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렇게 하룻밤만에 통합멤버십 사이트에서 운영할 콘텐츠 제안서를 완성하고, 다음 날 아침엔 내가 상무님을 독대해 제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드라마틱한 일정이 시작됐다.



회의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문제, 혹은 필요를 파악했다. 콘텐츠는 재미가 문제해결의 역할을 수행할 때 존재감을 갖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C사에 속한 브랜드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소비자들은 산재된 브랜드들이 C사에 속해있는지 인지하질 못했다. 그래서 C사는 통합멤버십을 만들어 물리적 혜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심리적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콘텐츠가 필요했다. 

* 그 외에도 몇 가지 굵직한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콘텐츠 안들이 있지만 분량 상 이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내가 낸 아이디어는 '미스터리 박스'였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나온 생각이었다.

* 잡지사에 근무할 때 '어느 날 하나의 박스가 배달되었다'라는 기획안을 낸 적이 있다.
에디터들이 각자 담당한 필자, 혹은 셀럽들에게 박스 하나씩을 보낸다. 박스 안에는 그 사람과 만나면 뭔가 참신한 생각들이 샘솟을 듯한, 하지만 엉뚱한 무언가가 들어있다.
콘텐츠는 보낼 물건의 선정, 필자에게 예고를 했을 때의 반응, 박스를 열어보며 나누는 통화, 물건을 확인했을 때 필자의 당혹감과 결국 필자가 그 물건으로부터 끄집어낸 이야기로 구성된다. 
포인트는 박스 안 물건에 대한 '에디터의 의도'와 '필자의 반응' 간의 부조화에 있었다.
* 일본에 머물 때 백화점 브랜드에 속한 프로야구팀이 리그 우승을 했다.
그때 그 브랜드의 오프라인 매장들에선 똑같이 생긴 종이봉투들을 가득 깔아놓고 판매했다. 구매자는 봉투를 만져볼 수 없었고 먼저 10,000원을 내고 갖고 싶은 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했다.
봉투 안의 물건들은 무조건 10,000원보다 가치가 높다는데, 우승 주역의 사인볼에서 경기 중 끼었던 글러브까지, 팬들에게는 '대박'인 물건들도 어느 봉투엔가 존재했기에 매장 앞에는 봉투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위 두 가지 모두 '안에 뭐가 있는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경험을 C사의 문제, 즉 '너무 브랜드가 많아 C사 브랜드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에 적용했더니 이런 기획이 나왔다.



<ONE박스>
(1) 고객들로이 C사에 일상의 고민이나 소원을 담은 사연을 보낸다.
(2) C사에서는 사연을 뽑아 자사 브랜드의 상품들로만 구성한 미스터리 솔루션 'ONE박스'를 고객에게 보낸다.
(3) 고객은 이 박스를 받아 문제를 해결하거나 소원을 이루고 후기를 공유한다.


포인트는 고객이 박스를 여는, 그래서 C사의 브랜드들을 만나는 '진실의 순간'이었다. C사의 브랜드들은 워낙 다양해 감동을 주는 솔루션을 구성하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후기에선 C사의 각종 브랜드들이 하나의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C사에서 통합멤버십을 만든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참여형 콘텐츠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밤샘 회의의 결과물을 후딱 PPT로 작성해 상무님과의 독대를 위해 택시를 탔다. 피곤했지만 긴장감으로 잠이 오진 않았다. 창밖을 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에선 이솝우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게으른 세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산을 포도밭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아들들은 유산을 찾기 위해 열심히 포토밭을 파헤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들의 부지런한 삽질 덕분에 그해 포도농사는 풍작이었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의도를 깨달아 각성을 한다는 얘기였다. 


'아!'


잠시 후,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상무님에게 난 뜬금없이 오면서 들은 이 포도밭의 유산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브랜드의 콘텐츠를 고객들에게 그냥 읽으라며 주면 얼마나 볼까요? 아버지의 유언처럼 고객들이 움직이고 느끼고 자발적으로 공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제안서에는 그 방법이 담겨있어요."


지속적인 운영을 전제로 한 8개의 콘텐츠 기획안을 상무님은 덥석 받아줬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된 디자인 시안은 한 번에 통과됐다.


하룻밤 동안 만들었던 당시 제안서의 일부




ONE박스는 통합멤버십 서비스 사이트의 메인 콘텐츠로 2년 동안 운영됐으며 2만 여개의 검색결과와 수백 개의 후기를 담은 블로그 포스팅이 올라왔다. 덕분에 큰 상을 타기도 했다. 클라이언트 TF는 다시 각 계열사들로 흩어지며 자신의 브랜드에도 고객이 포도밭을 일굴 수 있는 콘텐츠 코너를 제안해 달라며 초대장을 보냈다.


모두, 하룻밤 동안 작성한 두서없는 제안서를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할 아이디어를 준 이솝 덕분이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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