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채우기 시작한 40대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 1902-1994)은 사춘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인지하면 정체감을 획득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역할의 혼란에 빠진다고 덧붙였다.
마흔에 사춘기가 와버렸다.
서른여덟과 서른아홉, 2년 간 두 개의 힘겨운 프로젝트를 겨우 마무리했다. 그동안 소중한 팀원들의 절반을 잃었고 나는 길을 잃었다.
마흔의 어느 봄날 난 이사님에게 메일을 쓰고 있었다. (첫 프레젠테이션을 함께했던 그 이사님이다.)
목표가 있으면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적극성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저는 목표를 잃었습니다. 몇 번 언급하셨던 이사님의 입사 초기의 일들도 떠올랐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계시기에 아마도 부사장님은 그 노력들이 ‘옳았던 판단과 행동’이라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다섯 번 사직서를 냈고 번번이 반려됐다. 그럴수록 사직서의 문장들엔 점점 더 가시가 돋았다. 그렇게 회사와 일을 부정할수록 떠난 팀원들과 남은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은 커져만 갔다.
결국 여섯 번째 사직서가 수락됐을 때 마흔의 사춘기는 시작됐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그동안 버킷리스트로 적어놨던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다. 그게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시기에 가장 친한 친구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무력감이 찾아왔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그 친구의 지인을 만났고 떠난 친구를 잊지 않기 위해 함께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 했다. 공통의 관심사인 독서를 중심에 놓았더니 설립 취지(?)와 달리 역시나 사춘기를 맞이한 또래의 사람들이 하나둘 합류했고 모임에 몰입할수록 아픔은 치유됐다.
마흔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전문 분야인 콘텐츠에 대한 경험을 집대성해 보고 싶었고, 일을 하며 고갈된 지식의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첫 학기의 논문 팀과제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진행이 더뎠다. 퇴사를 한 뒤 난 조원들에게 말했다.
"퇴사한 김에 그냥 내가 할게요."
하고 싶은 말을 하니 홀가분했다.
마흔에도 수영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난 못했다. 그동안 딱히 불편을 느끼진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물속에서도 아빠의 역할은 해야 했다. 퇴사 후 수영장을 등록해, 두 달 만에 호흡하며 수영을 할 수 있게 됐다. 활동 무대를 물로 확장한 일종의 '진화'였다.
직장생활을 하며 10일간 휴가를 쓴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 버킷리스트에서 가장 반짝이고 있던 건 기자시절의 선배가 추천한 '피스보트'라는 10일간의 크루즈 여행이었다. 환경재단과 일본 피스보트 협회가 진행하는데 한국인과 일본인 각각 500명씩을 태운 크루즈선이 10일 동안 러시아와 일본, 네 곳의 기항지를 들러 동아시아의 평화와 환경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퇴사를 한 해 8월, 난 바다에서 처음 돌고래 떼를 봤고 군함도를 방문했으며 파도가 없는 망망대해에서 벅차오르는 경외감을 느꼈다.
매년 일본어능력시험을 신청했다. 대학시절 익혔던 일본어, 실무에 쓰진 못했지만 공부의 동기유발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을 핑계로 매번 공부는 뒷전이었고 결국 막판에 시험을 포기했다.
마흔이 된 해에도 신청을 해놨었다. 그리고 퇴사를 하니 시험까지 2주가 남아있었다. 교재를 한 권 사 공부를 시작했고 2주라는 시간에 대한 선입관을 버렸다. 그런데 헐! 합격이라니...
2주는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생각보다 유용한 시간이었다.
퇴사 후 겨우 세 달 동안 이 다섯 가지 일들을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난 생각보다 쓸만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퇴사 후 4개월이 지나니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예상치 못하게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옮기면서 퇴직금 잔고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젠 다시 일을 시작할 때가 왔다. 그리고 난 인하우스 마케팅을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포트폴리오를 본다면 콘텐츠, 캠페인, 혹은 웹 기획자이자 PM이었다. 이제는 명확하게 소속된 회사의 브랜드와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정량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다시 웹에이전시에서 일을 하는 게, 그 세계에서 전과 같이 살아가는 건 싫었다.
채용 포털 사이트에 '마케터 지원'으로 이력서를 올렸는데 한 달간 면접 제안이 한 건도 없었다. 명확하게 포트폴리오와 지원 분야의 미스매치였다. 하지만 바꾸긴 싫었다. 사춘기인 난 꼭 바라던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회는 꼭 올 거라 믿고 싶었다.
두 달째 됐을 때 거짓말처럼 몇 건의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 죽 프랜차이즈 B사
B사의 마케터 모집 공고에선 연령과 경력이 '불문'이었다. 면접은 다대다로 진행됐는데 4명이 한 조였고 30대로 보이는 마케팅 경력 지원자들과 함께했다. 몇 억짜리 프로젝트의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보다 더 진땀이 났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죽 상품권 두 장을 받았다. 그 상품권은 이 시절의 기념품으로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후 연령, 경력 불문 공고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 어린이 직업 체험 플랫폼 K사
동경하던 브랜드였다. 오래전 신문에서 글로벌 회사인 K사의 히스토리와 비즈니스모델을 보며 감탄했었다. 채용 분야는 IP 영업직이었지만 그 브랜드에선 어떤 일을 해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는데 면접 기회가 왔다. 예정보다 40분을 더 대기하다 면접을 봤는데 두 명의 면접관 중 상사로 보이는 사람은 내 이력서와 백발(30대 중반부터 난 백발이었다.)을 흘낏 보더니 잘 들리게 혼잣말을 했다.
"왜 영업 경력도 없는 사람이 서류 통과가 된 거지? 인사과 일 제대로 안 하네!"
10분도 안 돼 면접장을 나왔고 이날 염색을 했다.
* 중국 전문 광고회사 P사
면접의 감이 좋았다. 위치가 한남동이란 점도 맘에 들었다. 대형 광고회사의 중국 계열사였는데 1차 면접을 수월하게 통과했다. 한국 지사장과의 2차 면접은 무려 1시간이 넘게 진행됐다. 그런데 면접 막바지에 이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콘텐츠가 뭐라 생각합니까?"
그가 바란 답은 광고 관점에서의 깔끔한 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다른 분야에서의 너무 많은 정보와 경험이 있었다. 생각이 과부하 되어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전적으로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쉽게 떨어졌다.
이날 집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만의 콘텐츠 정의를 세워보는 것이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눈치가 보였고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이제 종종 측은한, 혹은 한심한 눈길을 보냈다. 다시 면접 제안은 뜸해고 이제 강한 압박감을 받았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에이전시에서 근무하던 시절 비딩에서 종종 마주쳤던, 즉 경쟁사였던 M사였다. 상대방은 자신을 상무라 소개했다. 그와 두 번 만났다. 채용 때문에 연락했다고 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고 일상을 얘기했다.
그리고 어느 저녁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느긋한 말투였다.
"어때요?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있나요?"
"예, 하겠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
가능하면 빨리 출근하는 게 좋겠습니다. 충. 분. 히. 쉬었으니까요..."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갔다. 마흔의 사춘기는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나는 마케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력직 마케터로 취업하기 위해선 '증거'가 필요했고 내겐 그런 게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할 수 있게' 된다.
그로부터 5년 후 난 대형병원의 마케팅 팀장이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여전히 명쾌한 답을 내릴 수는 없다. 답을 할라치면 세상은 너무 빠르게, 벌써 저만치 가 있다.
당신은 어떤가?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