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의 쓰임새에 대한 고찰
대기업들은 10년에 한 번씩 자신들의 역사를 업데이트해 '사사'라는 두꺼운 책을 발행한다. 한 대기업의 국내 최초 '디지털 사사' 제작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비딩을 어렵게 이겼을 때 클라이언트 부장은 상대편, 사사 전문회사와의 협업을 제안했다. 팀의 매출이 절실했던 난 웃으며 거절했다.
그러면 안 됐다. 경험 많은 사사 작가는 귀했다. 그마저도 전문 회사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결국 겨우 구한 작가가 두 번이나 교체되며 프로젝트는 곤경에 처했다.
그 와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겨울, 프로젝트를 마친 난 하얀 잿더미였다.
파견 중 회사는 이사를 했고 새 회사 건물은 상암 DMC에 있었다. 복귀 전 일부러 성북동의 예전 회사 건물에 들렀다.
면접을 보러 왔던 가을, 이 건물 앞에는 싱싱한 낙엽이 쌓여 있었고 면접관의 어린 쌍둥이가 뛰어놀고 있었다. 담배 파는 쌀가게 아저씨의 무심함이 편안했고 밤이면 야근을 하다 보면 서울의 어느 곳보다 진한 어둠 속에서 소쩍새 소리가 뜨문뜨문 들리던 동네였다.
회사는 이곳을 떠났고, 팀원 몇 명은 팀을 떠났고, 자신감은 나를 떠났다.
그 후 1년 동안 프로젝트 하나를 마친 난 여섯 번 사표를 낸 끝에 백수가 됐다.
번아웃과 손을 잡고 작성했던 버킷리스트에는 '대학원'이 담겨있었다. 13년 동안 일을 하며 그때그때 욱여넣었던 콘텐츠에 대한 지식의 퍼즐들을 맞춰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뭐라도 열심히 해보고 싶었다.
결국 마흔의 봄, 백수가 된 나는 퇴직금을 쪼개 대학원에 등록했다.
콘텐츠경영학과의 동기는 한 명이었다. TV에서 종종 보던 백종원 셰프와 닮은 그는 나보다 열 살이 많았는데 지자체 대상 브랜딩 에이젼시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경영대학원에는 과도, 학생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어느 회사의 대표, 임원이 그득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선 사회적 지위로나 나이로나 어렸다.
수업을 탐했던 나와 달리 동기님은 사람을 좇았다. 여러 모임에 가입했고 다른 과의 술자리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의 첫인사는 항상 이랬다.
"삼성의 전략 부서에 근무하다 지금은 사업을 합니다."
그러면 모두들 "오~"하며 반겼다. 어느새 그에게 붙은 두 개의 키워드는 #삼성과 #백종원이었다.
대학원 1학기, 그의 봄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수업이 있는 토요일이면 벚꽃 잎이 나리는 날이든, 봄비가 오소소 내리는 날이든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고 인사를 했고 약속을 잡았다.
반면 치유의 도구로 대학원을 택한 나는 조용히 수업에 들어가 새로운 정보에 귀 기울였고, 어렴풋하던 지식을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조용히 하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어 번의 워크숍을 갔고 느슨했던 봄날의 햇살은 점점 꼿꼿한 직사광선이 되어갔다. 그는 벌써 다음 학기 학생회 임원자리를 예약했다. 모두들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는 경영대학원의 어디에나 공기처럼 존재했다. 난 동기가 한 명쯤 더 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기말고사가 한 주 남았다. 수업이 끝날 때쯤 바쁘신 동기님이 끝나고 소주 한 잔 하자고 했다.
궂은 소나기가 날개를 반짝이는 B-52 폭격기처럼, 한두 차례 지상에 물폭탄을 선사했다. 그와 나는 비가 숨을 고르는 사이 가까운 돼지 껍데기집으로 뛰었다.
"웬일로 귀한 시간을 저한테?"
실없는 농담은 허공에 흩어졌다.
"사업이 어려워졌어."
항상 타인을 이야기하던 그가 나지막이 자신을 이야기했다.
그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지자체들의 브랜딩 용역을 수주하면서 회사를 꾸려왔다. 그런데 제도가 바뀌어 지자체들은 꽤 많은 비중의 용역을 해당 지역 업체에 맡기게 됐다. 그의 작은 회사는 서울에서의 경쟁이 버거웠고 단단한 연고를 가진 지역도 없었다. 그가 대학원에 온 이유는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데 '키'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더라고."
'툭'하고 불판 위 돼지 껍데기가 뛰어오르며 다 익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저었다.
"먹어~ 먹자고 하는 일인데."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서 그가 자퇴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를 찾는 건 나 혼자뿐이어서 신기했고 슬펐다.
살다 보면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기억할 수 있는 이별의 과정이 없었다면 이런 이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잊힌다.
내가 #삼성 #백종원 동기님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사라짐이 2년 전, 죽음으로서 사라진 친구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라졌는데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제는 나만 그들을 기억한다. 아니 기억하려 노력한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