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과 외국어
"어쩔 티비! 이번 시험도 영어는 포기!"
기말고사를 앞둔 중2 첫째는 당당히 선언했다.
문과인 아빠와 예체능계 엄마와 달리 첫째는 수학을 좋아하고 영어를 지극히 싫어했다. 얼마 전 중학교 첫 중간고사에서 그 취향을 점수로 증명했다.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던 점수, 영어학원에서는 수업시간에 졸고 있다는 선생님의 제보도 들어왔다. 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래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들에게 영어를 싫어하는 이유를 물었다.
"내가 컸을 땐 AI가 통번역 다 해 줄 건데 왜 공부를 해야 해?"
아들의 미래지향적인 답에 잠시 할 말을 잃어지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음... 미래에 그 정도의 AI가 나온다고 해도 말이지, 대화라는 게 단어와 문장이 오가는 게 다가 아니고 상대방의 표정과 톤, 어휘의 선택, 뉘앙스 등등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소통이야. 특히 외국어로 일을 하다 보면 뉘앙스나 태도가 더 중요할 때도 많아."
"아빤 잘해? 영어."
"헉! 그... 그게 말이지."
당황한 난 급히 20대의 추억으로 회피했다.
"아빤 대학교 때 일본어를 공부했단다."
"제2외국어로?"
"아니 유일한 외국어로... 제대 후 우연히 공짜 어학원 수강권을 얻어서 일본어를 시작했지. 입대 전 너무 놀아서 취업을 위해서는 열심히 해야 했어. 학교에서 학원이 멀어서 제일 마지막 시간을 등록했고. 그런데 월초에는 강의실에 학생들이 가득했는데 열흘쯤 지나면 아빠만 앉아있었어. 저녁 시간을 학원에 앉아 보내기에 그들은 너무나 혈기왕성한 나이였고 아빤 마이너스 스펙을 생각하면 절대 빠질 수 없었지. 결과적으로 일본인 선생님한테서 1:1 과외를 받는 꼴이 돼버렸지 뭐야. 가끔 데스크 눈을 피해 수업을 째고(아 이것도 교육상 안 좋은 말인데?) 선생님과 술도 한 잔씩 하고. 선생님과 예비역 아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났어. 선생님이 그 일본 연예인 누구더라, 닮은 사람이 있었는데..."
"어 뭔가 위험해. 엄마! 아빠가 옛날에 학원 선생님이랑!"
"쉿! 덕분에 아빠 일본어 실력이 몇 달 만에 일취월장할 수 있었어. 술집에서 선생님과 둘이 일본어로 얘기하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아빠도 일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나 봐. 어느 날은 옆 테이블에서 술 마시던 중년 회사원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 테이블에 와서 '니혼진은 일본으로 돌아가라'라고 소리치더니 테이블을 쾅 내리치는 거야."
"아니 일본어가 빨리 늘었다는 자랑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흠. 어쨌든 그때 선생님이 좀 상처를 받았나 봐. 얼마 뒤에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전해 들었어. 뭐 어쨌든 그렇게 우연찮게 일본어를 공부한 덕분에 1년 뒤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도쿄에도 다녀왔고, 첫 직장이 잡지사였는데 일본 뮤지션이 오면 일본어를 쓸 기회도 있었지."
"설마, 일본어로 인터뷰를 했던 거야?"
"에이 아냐~ 통역은 따로 있고 사진 찍을 때 포즈 설명하는 정도. 난간에 기대 보세요, 뭐 요런 거? 그런데 우리 영어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
"그랬었나?"
"못 믿겠지만, 아빤 40대에 외국계 회사에 다닌 적이 있어. 당시 디지털 PR분야에선 세계적으로 꽤 잘 나가던 회사였지."
"오~ 졸업한 뒤에 영어 공부를 한 거야?"
"아니 영어 못하는 건 똑같았지. 아빠도 의문이었어. 어떻게 면접까지 갈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면접 막바지에 면접을 맡은 부사장님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당신은 다 좋은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뭔지 알죠? 바로 영어! 이 회사 본사가 미국인 건 알고 있죠?라고. 하지만 아빤 한참 일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때라 이렇게 얘기했지. 입사를 허락하신다면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라고"
"헐~ 정말 그 나이에 그럴 생각이었어?"
"어, 외국계 회사를 지원한 이상 그런 각오는 했지. 그런데! 부사장님이 이렇게 얘기하더라. 40대에 난데없이 한 언어를 마스터한다는 건 경험 상 무리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다른 능력은 출중하시니 영어 잘하는 팀원들을 붙여줄게요. 다행히 당신이 맡게 될 클라이언트들은 외국 회사의 한국 지사들이라 영어보다는 한국어를 쓸 일이 많아요. 같이 일을 해봅시다,라고."
"이번엔 은근슬쩍 일 잘한다고 자랑하고 있어!"
"영어까지 잘했으면 장난 아니었겠지? 근무를 해보니 일상적인 업무는 괜찮았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답답한 부분이 있는 거야. 마치 유리천장 같이. 이런 일들이지."
(1) 해외에 본사를 둔 클라이언트들은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은 한국어로 하지만 보고서는 영어로 요청한다. 그런데 보고서가 너무 많다. 수시, 주간, 월간, 분기, 반기, 연간 헉헉~
(2) 주요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메일이다. 회사의 규칙 상 회신이 필요한 메일은 받은 지 10분 이내에 피드백을 줘야 한다. 부장급이면 수신, 참조 다 합해 하루에 수십 통의 메일을 받는다. 그중에 본사에서 오는 영어 메일도 많다. 나는 부장이었다.
(3) 가끔 미국 본사에서 중요 스태프가 방문한다. 부장급 이상은 그들과의 미팅에 참석한다. 어렵게 외운 개인 및 팀 소개 후 난 과묵한 참석자가 된다. 이 회사가 추구하는 최고의 미덕은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4) 본사에서는 실제 업무와 상관없이 직원이 성장하고 싶은 분야를 4가지로 분류해 선택하게 한다. 이 분야를 바탕으로 세계 직원들의 해당 분야 커뮤니티에 소속되고 정기적인 글로벌 세미나에 초대를 받는다. 한국 지사에서 난 유일하게 '데이터 분석' 조직에 속했는 데도 북경에서의 커뮤니티 세미나 초대장이 왔을 때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 대신 영어를 잘하는 임원과 팀원이 참석했다.
"아빠... 안타깝네."
"그치? 영어를 잘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
"뭐, 쪼금 그렇긴 한데, 외국계 회사를 안 가면 되잖아? 우리나라에도 좋은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흠. 아냐, 방심하지 마, 한국 회사에 근무해도 해외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 지금이 어떤 시댄데!"
난 다시 먼 허공을 바라보며 과거의 경험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빠가 웹에이젼시에서 근무할 때 가장 자신 있던 프로젝트가 여행 콘텐츠 분야였어. 덕분에 가장 많이 진행하기도 했고. 대표적인 게 국내 한 항공사의 웹진이었는데 '카메라군'이라는 캐릭터가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겪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였지. 실제로 아빠 팀에서는 무려 그 항공사의 취항지들을 전부 돌며 콘텐츠를 제작했단다."
"얼~ 그럼 영어도 잘 못하는 아빠가 해외에 많이 나가봤겠네?"
"노노, 아빠는 실무자가 아니라 팀장이자 PM, 즉 프로젝트 지휘자였어. 예산이 넉넉지 않은데 아빠까지 따라가는 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어. 그래서 실무자들만 출장을 갔지. 쩝. 사실 정~말 가고 싶었는데 말야!"
"풉, 영어 못해서 못 간 건 아니고?"
"... 뭐 여튼, 그 웹진이 유명해지니까 다른 곳의 일을 할 기회도 생겼어. 미국 캘리포니아의 관광청 웹진도 그중 하나였지. 당시 미국 비자가 자유화되면서 미국 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늘어나니까 캘리포니아를 새롭게 브랜딩해 홍보할 필요가 생긴 거야. 아빠네 팀이 제안한 콘셉트는 '호텔 캘리포니아'였어. 캘리포니아 어딘가에 호텔이 있는데 사연을 갖고 캘리포니아에 와 여행을 한 한국인 셀럽들이 그 호텔에 하룻밤을 묵으며 주인장인 필립 고든에게 자신의 사연과 캘리포니아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스토리였지."
"아빤 또 못 갔겠네? 무려 미국인데."
"기본적으론 아까와 같은 이유로 못, 아니 안 갔지. 그런데 세쿼이어 국립공원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다루는 스토리의 출장에 아빠가 섭외한 유명 작가가 참여하게 된 거야. 그 작가가 좀 예민해서 아빠가 함께 갈 수밖에 없었어. 뭐 간 김에 아빠가 실무도 맡기로 했고."
"어찌 됐을까나~"
"취재는 좋았지.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고래만 한 나무들, 요세미티 국립공원 하프돔에 내리는 석양, 나중에 너희도 함께 가면 좋겠구나. 그런데 문제는! 매일 오후 4시면 어김없이 펼쳐지는 만찬이었지. 우리 팀이 나름대로 캘리포니아 관광청 입장에서 중요한 손님이었던 거야. 그래서 오후 4시면 숙소의 매니저들이나 관광청 본청 사람들과 식사를 해야 했어. 그런데 그들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지. 미국에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은 당연히 영어를 잘할 거라고 말야. 바로 속사포 같은 비즈니스 영어로 아빠에게 말을 하는데 하나도 안 들렸어. 아빤 나름 제작 쪽 책임자로 간 건데... 결국 상대방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지. 아이 캔트 스픽 잉글리시 웰... 그 뒤로 아빠한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고, 덕분에! 아빠는 혼자서 아주 여유 있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지! 하하흐흐흑."
"휴... 상상만 해도 저녁 먹은 게 얹혀."
"3일째가 되었을 때 우리 일행은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에 도착했어. 스케일 큰 자연과 끝없는 도로, 특색 있는 소도시들을 거쳐 드디어 큰 도시에 온 거야. 그리고 전형적인 미국 도시 주택가에서 오후 4시의 만찬이 진행됐지. 와인이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우리 앞에 앉은 이들은 캘리포니아 관광청 본청의 임원과 직원들이었어. 여지없이 영어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어..."
"휴..."
"콘텐츠 제작 쪽 기획과 프로젝트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는 잘 못합니다. 대신 일본어는 좀 해요. 혹시 한국어나 일본어 하는 분 있으면... (수줍게 후닥닥 퇴장...)"
"얼~ 영어로 한 거?"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여느 때처럼 혼자 여유 있게 식사를 마쳤는데 식후 스케줄까지 있더라고. 역시 본청 직원들인가 싶었지. 그들은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을 보여준다며 제임스타운이라는 곳에 데려가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역사에 대해 알려주고 사금 채취 경험도 시켜줬지. 그때 채취한 금으로 만든 게 이 금니야. 아~"
"안물 안궁!"
"하하~ 농담이고, 투어가 끝날 때쯤 본청의 J라는 사람이 나섰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푸른 눈에 금발이 어깨까지 오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지. 한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셨는데 자신이 새크라멘토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을 소개하고 싶다고 우릴 안내했어. 새크라멘토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야경이라나. 모두 이동을 위해 차로 가는데 J는 내 어깨를 툭 건드렸어. 그리고 말하더군."
"내 차 타고 갈래요?"
"난 엉겁결에 J를 따라가 매끈한 SUV의 조수석에 올라탔지. 그리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J는 일본어로 말을 걸었어. 일본 지사에서 2년간 근무를 한 적이 있대. 그때 일본어를 배웠다고. 아빤 반가웠어. 드디어 입을 열고 그에게 물었지. J는 새크라멘토를 두어 단어로 표현한다면 뭐라 하겠냐고. J는 답했지 '가족, 그리고 행복.' 언어는 마법 같았어. 그 두 단어가 J의 입 밖으로 나오니 창밖 낯선 도시의 야경이 순식간에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더라고. 낭만적인 시간이었지."
"음..."
"우리는 일행들보다 먼저 그 오래된 호텔에 도착했어.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 J와 함께 새크라멘토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눴지. 언어의 벽이란 게 사라지니 아주 편안했어. J는 캘리포니아의 몇 가지 옛이야기를 들려줬어. 그 오래된 호텔에 대한 이야기도 말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야경을 보니 도시를 덮고 있는 오렌지빛 조명들은 과거 이 땅에서 나왔던 사금 조각들을 떠올리게 했고. J와 아빠는..."
"엄마! 아빠가 미국에 가서 어떤 여자랑!"
"아들아, J는 남자란다. 나중에 J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
"자 이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지?"
"아빠가 얘기 중 어디에 그 이유가 있었을까? 영어 잘하면 미국 가서 밥도 편안히 못 먹고, 로맨틱한(?) 사건이 벌어질 기회도 생기지 않고. 그런 거?"
"음... 에잇~ 그냥 해!"
"어쩔~~"
아들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기 방에 휙 들어가 버렸다. 설득은 실패였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내 입에선 한숨처럼 이 말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그때 영어를 잘했더라면...'
아들이 방으로 들어간 뒤, 난 노트북을 열고 최근에 온 헤드헌터의 메일을 열었다.
외국계 광고회사 기획본부장 포지션의 지원 의사를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세 개의 라디오 버튼 중 하나를 택했다.
'저와 맞지 않는 제안이므로 지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사유를 적는 난에 굳이 내용을 남겼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할 당시 실무는 문제없었지만 리더급으로서 본사 임원 방문이나, 해외 출장 시 영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외국계 기업에는 지원 의사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고 좋은 자린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B급아빠는 후닥닥 뛰어가 아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들아!! 역시 해야 해! 영어 공부."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