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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7. 2024

태양계를 이탈함

40대에 느즈막히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된 사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파견팀과 회의를 마치고 을지로 역에 도착할 즈음, 다시 걸음을 돌려 C푸드 본사로 향했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K에게 전화했다. 부쩍 쌀쌀해진 11월의 늦은 오후였다.


K가 로비에 나타날 때까지 난 로비의 딱딱한 의자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 경우의 수를 따졌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그가 필요하다.'


이제야 몸에서 힘을 빼고 건물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늦가을의 마른 햇살은 퇴근하는 직장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한창 그림자놀이에 빠져 있었다. K가 왔고 그 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다. 그는 일어서며 말했다. 


"생각해 볼게요."


K는 한 대기업 모바일앱의 UX 리뉴얼 프로젝트 PM으로 파견을 나와있었다. 전임 PM이던 창업자의 아드님은 프로젝트가 한창인 때 출처가 불명확한 복귀 명령을 받고 사라졌다. K는 급하게 투입된 대체 PM이었고 아직 정식 입사 전이었다. 그 프로젝트의 최종 책임자, 즉 사업부장이었던 난 그날 K에게 '프로젝트 종료 정식 입사'를 제안했다. 




1년 전 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 임원으로서 회사에 복귀했다. 30대를 온통 쏟아부었던 회사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선택적 망각 덕에 좋았던 기억만 떠올리며 왔지만 막상 내부를 살펴보니 사업부가 오래, 그리고 멀리 갈 수 있는 동력원이 보이질 않았다. 예전에 함께하던 이들은 대부분 회사를 떠난 뒤였다. 


대기업의 UX파트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K와 함께한다면 UX라는 차별점으로 사업부를 다시 일으킬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 달 후, K가 프로젝트 팀과 함께 복귀했다. '파견 팀으로 UX팀을 구성해 자신이 지휘하는 것', 그의 입사 조건이었다. 그와 팀은 산전수전을 함께 겪었으니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제대 신고를 마치고 막 부대의 정문을 나선 예비역처럼.


하지만 K와 팀은 6개월 간 새 프로젝트를 수주하지 못했고 결국 팀 전체가 정리해고 됐다. 그 결론을 강하게 반대해 온 난 사표를 냈다. 


들썩이는 개인적 사건들에 개의치 않고 계절은 여름의 싱그러운 초입이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그 뒤로 사업부들이 하나둘씩 해체됐다고 한다. 이제 내 선택적 망각은 그 회사에서의 좋지 않은 일들만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한 대형병원의 마케팅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내게 K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어있었다.


"팀원들은요?"


"시작은 함께 했는데 다들 그만뒀어요."


한동안의 정적을 지운 건 K였다.


"졸업생 중에 똘똘한 친구 데려와서 다시 시작했어요. 어찌나 빠릿빠릿 일을 잘하는지,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하하. 특허도 하나 출원했어요."


그는 한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UX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나도 그의 수업에서 콘텐츠 마케팅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본 그의 제자 중 하나일 것이다.


"아쉽지 않아요? 아끼던 팀원들이었는데."


"먹고는 살아야죠. 나도, 그 친구들도. 능력 있는 애들이라 다 좋은 곳으로 갔어요."


"예..."


"나랑 같이 일 안 할래요?"


"예? 에이, 제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냥 마케팅, 사업기획, 제안, 발표같이 해오던 일들요. 막상 시작을 하니까 내가 안 해 본 것들 투성이네요."


나는 말을 돌렸다. 지금 근무하는 회사와 그의 스타트업은 비교 자체가 되질 않았다.


그 뒤로 케노비는 견적서를 짜거나 회사 소개서를 쓰거나 계약서 작성을 할 때 내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난 그의 회사 홈페이지 텍스트 전체를 작성해 줬고 기술을 설명하는 프로토타입 영상에는 아내의 음성이 쓰였다. 그렇게 나는, 하나의 법인이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때론 거들었다. 



또 1년 반이 흘렀다. 대형병원의 마케팅팀에서 한 해 반을 온전히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입사한 해 병원은 역대 최고 매출을 올렸으나 이듬해 코로나19가 창궐했고 세상은 우울함 속에 격리되었다. 병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K의 회사는 직원 수가 5명으로 늘었다. 

경력 많은 개발자가 CTO로 들어왔고 제자 2명이 새로 입사했다. 이들에겐 케노비, 레이아 같은 호칭이 붙었다. 스타워즈를 사랑했던 K는 직원들에게 스타워즈 등장인물의 이름을 부여했다.


2021년 1월, TV에선 <싱어게인>이라는 경연 프로그램이 화제였고 나 역시 그 뜨거운 무명가수전에 몰입해 있었다. 특히 ‘다린’이라는 가수의 노래 <태양계>에 마음이 쓰였다.


<태양계>

나의 사랑이 멀어지네
나의 어제는 사라지네
태양을 따라 도는
 별들처럼 
돌고 돌고 돌고
그대를 향한 나의  어리석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머물
 못하는
  눈에 고인
눈물이 흐르네

 

함께 병원에 근무하는 누군가에게 술자리에서 이 가사를 얘기한 적 있다. 


"노래를 들으며 생각들이 꼬리를 물더라구요. 난 행성이고 노래처럼 돌고 돌고 돌고... 회사를, 상사를 태양 삼아서요. 난 항상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나. 행성이 태양계를 벗어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노래 탓일까? 더 늦기 전에, 좀 더 나이 먹기 전에... 태양계를 벗어나 보고 싶었다. 그동안 목적 없이 모아놓은 약간의 노잣돈이 있었고 가족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2020년 2월, 나는 K의 회사 창립 1주년 행사에 초대받았다. 그의 직원들과 공용오피스 로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고, K는 같은 층의 다른 스타트업 사람들에게 백설기를 돌렸다. 난 백설기를 입에 가득 담은 채 K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 사람 뽑나요? 나이는 좀 되는데...”


그렇게 나는 태양계에서 '툭' 떨어져 나왔다. 혜성처럼 불안하고 설렜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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