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제안과 정부지원사업 제안의 차이점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나누던 대학시절 친구 D에게 이 말이 하소연처럼 툭 튀어나왔다.
2021년, 스타트업 입사 1년 차에 지원한 정부지원사업 사업계획서들이 모조리 휴지통으로 사라진 시점이었다.
"에이전시 다닐 땐 대기업이고 관공서고 비딩 들어가서 곧잘 따오지 않았어? 정부지원사업은 달라?
"어, 달라... 많이."
두 번째 직장은 디자인 에이젼시의 디지털 사업부였다. 웹은 디자인만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서 기획부터 개발까지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30대 초반에 그곳에 입사해 마흔이 되는 해 퇴사했다. 그 8년 동안 참여한 비딩은 27건, 내가 담당한 기획 2팀은 8명의 팀원들과 함께 주경야독처럼 낮에는 맡은 프로젝트를 하고 밤에는 새 프로젝트 제안을 준비했다. 그래야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프로젝트는 기업으로부터 제안요청서(RFP -Request For Proposal)를 받아 제안서 제출과 PT를 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면 우선협상 대상이 된다. 그리고 별 문제가 없으면 수주로 이어진다. 다행히 업력이 오래됐고 브랜딩이 잘 되어있는 회사라 초대장(RFP)은 끊이지 않았다.
"뭐가 다른데?"
D가 소주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방금 나온 산곰장어들이 불판 위에서, 클럽에 첫 발을 디딘 20대처럼 격렬히 춤을 췄다.
"에이전시에서의 제안은 프리스타일이랄까? 이 곰장어들 같이 파닥파닥, 좀 더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곰장어들은 금세 지쳤다. D는 집게를 들어 그들을 줄 세웠다. 행렬이 되어 가는 곰장어들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다. 사실 자유도는 정부지원사업의 사업계획서가 훨씬 크지. 문제 자체를 정의해야 하니까."
잠시 우울했다.
"입사해 보니 이미 특허기술이 있었어. 더 멋진 AI챗봇, 그런데 더 필요한 기술은 아니었나 봐.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보니 알겠더라고. 사업계획에서는 해결할 문제가 핵심이거든. 맥락이 이런 식이야. 험험. 약장수 모드로 말해볼게. 이런~ 아직도 이런 문제가 존재했다니요. 이 데이터들을 보세요, 심각하죠? 이걸 우리 기술로 해결하려 해요. 다른 회사의 유사한 기술보다 이런 점이 뛰어나거든요. 개발 원리는 이런 건데요, 사용하는 기술도 트렌디하고 아이템의 사업성도 아주 좋아요~ 첫 해에는 매출이 크진 않겠지만, 2년, 3년 지나면서 이러저러한 마케팅과 제휴를 해나가면 이런 큰 매출을 거둘 수가 있어요. 덩달아 해외까지 진출해 국위선양을 할 수 있으니. 헉헉, 어때요, 우리를 지원해 주는 게?"
타는 냄새가 나 곰장어들을 불판의 가장자리로 하나 둘 옮기며 한숨처럼 결론을 내렸다.
"다른 점? 기업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의 차이지. 기업이 주는 RFP에는 이미 그들의 문제가 정리되어 있고, 스타트업은 문제 자체를 제시해야 해."
곰장어를 입에 넣고 소주잔을 들이켰다.
"차별화된 특허 기술들은 만들어 놨는데 말야, 문제는 그 기술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쓸지에 대한 거지, 그게 실패였어. 좋은 문제를 짚어내지 못한 게."
잔을 채워주는 D의 표정이 심각했다.
"뭔가 앞뒤가 뒤바뀐 거 아냐?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사용할 문제라니."
매콤한 곰장어 양념처럼 뜨끔한 말이었다.
이제야 D의 안부를 물었다.
"당분간 대전에서 일하는데 워낙 코로나가 극성이니 사람 안 만나고 소소한 취미 활동을 하고 있지. 이거 함 보여줄게."
D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여줬다. 그의 중 1 아들 유튜브 구독자는 1천 명 대, 그런데 조회수가 무려 60만이 넘는 영상이 있었다. 레고로 만든 캐릭터에 에어브러시로 색을 입혀 실제 캐릭터와 가깝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대단한데?"
콘텐츠보다 숫자에 시선이 더 갔다.
“난 베란다에서 채소를 키우고 있고.”
D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철제 프레임을 만들고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조명을 설치한 홈가드닝 장치였다.
"와! 직접 만든 거야?"
"응, 이거 저거 검색해 보면서 만들었어. 프레임은 이케아에서 구입한 거고. 이 LED가 태양의 역할을 하는데 홈오토를 이용해서 조명의 일정 관리를 하는 거야. 지금은 상추를 키우고는 있는데…"
별안간 내 직업병인 '사업계획 모드'가 퍼뜩 켜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방의 땅을 구하긴 쉬워지겠지? 농촌지역 고령화가 심각하니깐. 그렇지. 근데 이건 땅의 넓이가 중요하지 않아. 층층이 위로 쌓으면 되는 거니까. 또 이렇게 조절할 수 있다면 매년 어떤 작물을 키울지만 선택을 잘하면 되는 거야. 농업도 마치 주식 같은 투자 개념이 들어갈 수 있겠구만. 아니지 아예 채소가 소비되는 과정과 최종 소비자까지 연결하면 수요예측이 쉬워지겠네. 난 산와사비를 키워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몇 년 전에 일본 홋카이도에 여행을 갔다가 삿포로에서 현지인들이 찾는 외진 동네의 이자카야를 갔는데 삼겹살에 산와사비를 갈아서 하얗게 얹어주는 요리를 먹어봤어. 그 뒤에 한국에서 보니 녹색 와사비와 삼겹살을 같이 먹는 식당들이 눈에 띄던데 산와사비는 찾기 힘들더라고. (긴 후략)"
D는 공기업에 근무했다. 승진도 느리고 급여도 만족스럽지 않아 30대엔 이직도 생각했지만 그 업계에서의 이직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한 회사에서 20여 년을 근무했고 중간에 대학원에 진학해 빅데이터 관련 석사과정을 밟아 지금은 회사와 가정에서 그 지식을 써먹고 있다.
"좋아 보인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이 한마디에는 양념과 뒤섞인 곰장어들처럼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곰장어집을 나와 성신여대역으로 걸어가다 D는 문득 친구인 C의 이름을 꺼냈다. 나와 D, C는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절친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사업을 시작한 게 C였지."
"그러게, 회사 다니면서도 창업만 생각했지. 한때 같이 고민했던 게 민박 예약 플랫폼이었나? 에어비앤비보다 먼저 시작할 수 있었는데 말야. 하하~"
C는 결국 다니던 유통 관련 대기업을 그만두고 30대 중반에 냉동창고를 낀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직원 다섯이 되면 워크숍 갈 거라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러기까지 5년이 걸렸다.
첫 워크숍 회의 후 술 한 잔을 하고 귀가한 C는 그날 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른아홉이었다.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땠을까?"
"막 불판에 뛰어든 산곰장어처럼 펄쩍거렸겠지. 요즘은 지원사업도 많고 투자도 잘 되는 때니깐. 잘했을 거야. 걔는..."
번화가의 사람들은 막차를 타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C가 인생의 막차를 타기에는.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