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순수한' 방송 출연기
2021년 10월, 회사 대표 K는 이런 내용이 담긴 메일을 내게 전달했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니, 스타트업이 무려 TV에 나올 수 있는 기회인데 왜 그런 표정을?'
"연락 한 번 해봐요. 얼만지 물어보고."
창업 초기엔 그도 이렇진 않았단다. 종종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취재 요청 메일이 왔고 드디어 세상이 우리 서비스를 알아주나 보다 하고 기대에 차 전화를 해보면 상대방은 대가로 몇십만 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매번 이번엔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다. 절실했으니까. 스타트업에게 언론 노출 기회는 정말 소중했다.
난 이전 회사에서는 검색광고에만 한 달에 몇 억을 썼다. 지금은 광고 예산이 전혀 없다. 할 수 있는 건 자체 채널을 활용한 콘텐츠 마케팅이나 소액을 써서 보도 듣지도 못한 언론사에 기사를 싣는 유료 PR이 전부였다.
난 방송작가와 간단히 통화를 한 뒤 대표에게 말했다.
"무료래요. 검색해서 우리 회사를 찾았대요."
대표의 표정이 급변했다.
"뭐해요. 얼릉 하겠다 해요!"
그렇게 첫 방송출연 준비가 시작됐다. 그 과정을 여기에 적어본다. 혹시나 '순수한 TV 방송 제안'을 받은 회사분들을 참고하시길.
* 촬영 내용 요청사항
1) 전반적인 코너의 구성은 관련 기술을 소개하고 이 기술이 시연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관계자 분 인터뷰가 내용 흐름에 맞게 중간중간 짧게 들어가는 형식입니다.
2) 촬영이 확정된다면 구체적인 촬영 날짜는 00월 00일 중으로 제안드립니다.
구성안 내용은 원하시는 내용에 따라 수정 가능합니다.
(* 인터뷰 -인터뷰 질문지는 담당자분이 충분히 설명하실 수 있을 정도의 내용 안내&설명 정도이며,
구성안에 포함되어 보내드립니다.)
방송국에서 섭외를 한 이유는 회사의 '에이스쿼트'란 서비스 덕분이었다. 에이스쿼트는 AI 머신러닝 기술을 이용해 정확한 스쿼트 동작을 가이드하는 홈트앱이다. '어른'들의 참견 없이 신입, 혹은 인턴들이 서비스를 기획해 보는 사내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서비스였다.
3명의 멤버가 발견한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한 운동부족이었다. 이 때다 하고 다양한 홈트 앱들이 출시됐지만 동작인식의 정확도가 낮았고 기회는 거기에 있었다. 일단 스쿼트 한 종목으로 앱을 구축해 보기로 했고 기획과 디자인을 마친 뒤 드디어 어른들(개발자 등)에게 협업의 초대장을 보냈다.
요즘 친구들은 참 빨랐다. 이들의 연차라면 예전 근무했던 에이젼시에서는 겨우 선배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었을 텐데, 기획서도 디자인도 뚝딱뚝딱 잘도 해낸다.
AI 학습을 통해 정확도를 끌어올려야 하는 막바지에 사무실은 후끈했다. 모두들 AI의 학습과 정확도 측정을 위해 시간 날 때마다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고 스쿼트를 하는, 너무나 건강한 일상이 사무실에 펼쳐졌다.
피드백의 음성은 원래 ios에서 제공하는 여성 기계음으로 하려 했으나 인간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전 직원 음성 콘테스트가 열렸다. 그 결과 막내 남자 개발자의 젊고 신선한 목소리가 채택됐다. 이후 여기저기서 스쿼트를 하는 직원들에게 핸드폰 속에 들어간 막내 개발자는 훌륭한 트레이너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21년 여름, ios 버전 서비스를 오픈했다.
이렇게 모두가 참여한 서비스다 보니 흥미로운 스토리가 넘쳤고 인터뷰로 할 말도 많았다. 방송국에서 보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고 인터뷰이를 정해 분배하는 내 역할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송국에 대본을 보내고 인터뷰들에게도 공유했다. 대표는 외우고, CTO는 태블릿으로 프롬프트를 준비하고 난 그냥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외워봤자 녹화가 시작되면 머릿속은 하얗게 된다. (예전에 등장했던 '설국현상') 그냥 ‘애드리브가 잘 나오도록’ 내용은 무의식에 담고 잘 자고, 잘 먹고, 마음의 준비만 했다.
3) 지금으로서 원하는 촬영 내용은, 귀사의 동작 인식 기술이 들어간 프로그램을 직접 시현하는 현장 + 관계자분 인터뷰 등을 촬영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협의 가능합니다 / 방송 구성 방향을 제안해 주셔도 무방합니다)
촬영이 시작됐다.
방송 분량은 15분 정도라고 했는데 촬영은 반나절이 걸렸다. 촬영 장소는 공유 오피스의 공용 공간이었다. 코로나로 공간 사용이 자유롭진 않았지만 사전에 허락을 얻었고 눈치껏 통행에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스타트업들이 입주한 곳이라 서비스 관련 촬영이 빈번히 있었기 때문에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시연은 홈페이지에서도 에이스쿼트 대표 모델로 등장했던 디자이너 레아가 맡았다. 촬영하는 반나절 동안 레아는 100회 이상의 스쿼트를 했고 설정에 따른 연기까지 소화했다.
사무실에서는 인터뷰가 진행됐다. 내가 쓴 대본들이 직원들의 몸짓과 입을 통해 영상화되는 걸 보니 뿌듯했다. 다행히 내가 맡은 비즈니스에 대한 부분도 별 탈 없이 넘어갔다.
몇 주 뒤, 아리랑 TV를 통해 방송이 되었다.
메이저 지상파는 아니었기에 파급효과가 크진 않았지만 의미가 있는 건 서비스에 대한 공신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해외에서도 뉴스가 방영되다 보니 방송 후 두 군데의 미국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방송계에 두터운 인맥이 있거나 한껏 성장해 전담 부서를 두지 않는 한, 스타트업이 방송에 출연한다는 건 어쩌면 운이다. 그러니 기회가 온다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 스타트업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바로 그 운이다. 전시나 행사에서 우연히 서비스와 합이 맞는 협력사를 만나 성장을 했다, 혹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투자자가 사무실에 찾아왔고 이유를 듣고 보니 전혀 의외의 인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다 보니 운의 중요성을 믿었고 운이 올 확률을 높이기 위해 많이 만났고 행사에도 많이 나갔다.
결국 운을 불러오는 건 부지런함이었다.
* 그리고 남은 이야기
1. 신입들이 주도한 프로젝트 결과물이라 혹여나 완성도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이 앱은 2021년 스마트앱어워드의 건강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특히 AI의 '정확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직원들의 탄탄한 코어가 만든 결과다.)
2. 아쉬운 점은 네이버에서 '에이스쿼트'로 검색을 하면 아래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이미 '에이스쿼드'라는 유사한 이름의 완구가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꽤 후순위로 노출이 된다. 새로운 서비스의 네이밍을 할 때는 아무리 마음에 든다고 해도 상표권 등록 여부와 해당 단어의 검색 결과를 확인하고 확정하도록 하자.
3. 앱 구축을 통해 개발한 AI머신러닝 기술은 정부의 AI바우처 사업 공급기업 기술로 등록이 되었다.
4. 에이스쿼트는 현재 앱스토어서 동면상태다. 코로나19로 뜨거웠던 홈트앱 시장은 팬데믹의 종료와 함께 급속히 식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