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어느 일요일, 나는 사무실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2022년 AI바우처 지원사업’ 지원 마감 하루 전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열어 P와의 카톡 대화창을 확인했다. 숫자 1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최근 통화 목록에서 P의 전화번호 옆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여. 전. 히. 꺼. 진. 채. 다.
머리를 감싸 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17층 창밖으로 강남의 빌딩들 사이에서 붉은 겨울 해가 천천히 모습을 감춰가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사무실 문을 나서며 전등을 껐다.
- 암전 -
“다녀왔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터덜터덜 들어오는 내 표정을 본 아내가 물었다. 일요일에 출근을 한 게 이미 '무슨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한 게 있다는 걸 아내는 눈치챘다.
“사람이 말야,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엥?”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주말이 끝나가는 시간, 월요일 출근 준비와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해야겠다. 밤 12시가 가까워질 무렵에야 나와 아내는 커피 한 잔씩을 놓고 마주 앉았다.
나는 회사에서 ‘AI바우처 지원사업’이라는 정부지원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특허 기술을 가지고 사업 기회를 찾는 기술 공급자와 사업모델은 있는데 필요한 기술이 부족한 기술 수요자를 연결해 주는 게 이 지원사업의 내용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AI 관련 특허를 가지고 있었고, 대표와 친분이 있던 다른 스타트업의 대표 P와 Y는 자신들의 사업, 즉 '머신러닝을 이용한 골프자세교정 모바일앱'과 'AI챗봇을 이용한 노무관리 서비스'에 우리 특허 기술을 쓰고 싶어 했다. 그렇게 수요과 공급의 니즈가 만나 2주 동안 두 개의 사업계획서를 이들과 함께 작성하고 있었다.
“그거 마무리한다고 출근한 거잖아.”
“응, 우리 두 개나 지원하려고 준비 중이었지.”
마감을 3일 앞둔 금요일 오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입안이 바싹 말라있었다.
"같이 준비하던 P가 연락이 전혀 안 되네. 수정할 내용들도 있는데..."
"음, 무슨 일 있는 거 아닐까?"
"글쎄 금요일 오전까지도 전혀 별다른 낌새가 없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야."
커피 한 모금을 가볍게 들이켠 B급아빠는 갑자기 아내의 눈을 깊이 보며 물었다.
"그렇게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을까? 넌 그런 경험이 있어?"
"글쎄?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서 알던 공대 남자애 하나가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어."
"그리고?"
"두 달만인가? 갑자기 다시 돌아왔어. 철학책을 읽다 왔대. 좀 소심해서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는데 누군가 철학책을 읽으면 고민이 해결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줬나 봐 "
"철학에 몰입하다 보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음... 만나는 모든 애들에게 철학 얘기만 했어. 칸트, 헤겔, 니체... 그렇게 어려운 철학자들은 아니었지. 그런데 포교를 하는 느낌이랄까? 좀 일방적이었지. 그러더니 얼마 있지 않아 애들이 그 아이를 피하게 됐어."
"너도?"
"아니, 난 잘 들어줬어. 뭐 나름 재밌기도 했고.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는 나한테 또 철학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내게 화를 냈어."
"왜?"
"다른 아이들은 자기를 피하는데 왜 나는 들어주냐고. 그래서 나도 화를 내버렸지. 그 아이는 다시 잠적하더니 방학이 끝나고 나서야 나타났어. 이번엔 평범한 공대생이 돼서. 넌 그런 경험이 없었어?"
"있어. 기자였을 때. 아주 심플한 독자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때 만난 인터뷰이."
"여자?"
"응, 말하지 말까?"
"아니 말해봐."
"뭐 너 만나기 전의 일이니까. 인터뷰를 하고 나서 그냥 의례적으로 다음에 차 한 잔 하자는 인사를 나눴어.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그 독자한테서 연락이 온 거야. 주말에 차 한 잔 하자고. 나도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아.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그날 약속 장소에서 한 시간 16분 동안 기다렸어."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기억해?"
"한 시간이 지난 뒤로는 일 분만, 일 분만 하면서 열여섯 번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거든. 후련했어. 사실 편집부에서 이성의 독자를 만나는 건 금지된 일이었거든. 괜히 안 좋은 소문날까 봐."
"정말 사라진 거야? 나중에라도 연락 없었고?"
"응, 한두 번 전화를 해봤는데 안 받더라고.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사라진 거지. 전화번호 외에는 놀랍도록 접점이 하나도 없었거든."
"지금 P라는 사람이 사라진 건 그런 일일까?"
"그건 아니지. 그쪽은 법인의 대표잖아. 무수한 링크가 있지. 하지만 주말에 이런 일이 생겨서... 사무실에선 아무도 전화를 안 받아. 방법이 없어. 참 편리한 세상이야. 핸드폰을 끄면 사라질 수 있어. 난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니. 옛날에는 어땠을까?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 밖의 차가운 날씨와 겨울 이불의 포근함이 주는 대비는 '그래도 내일은 괜찮겠지'라는 낙관적인 느낌을 안겨줬다.
월요일, 회사에 출근해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공유했다. 그건 큰 일이었다. 2주간의 노력이, 가져올 수 있는 매출이, 초기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달려있는 일이었다. 대표의 큰 한숨이 들렸다. 그 소리가 사라진 P에게 닿지는 않았다.
카톡이 왔다. 다른 사업계획서를 함께 준비하던 Y였다. 무사히 제출을 마쳤단다. 곧이어 마감시간인 오후 1시에 여느 월요일처럼 주간회의가 열렸다. P의 부재에 대한 의문은 화로 바뀌었다. 회의 중 오가는 말들을 전혀 들리지 않았다.
15분 뒤 또 하나의 카톡이 왔다. 사라진 P가 나타났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으며 다행히 마감이 3시간 늦춰져 지금 사업계획서를 마무리해 제출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복귀가 기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마감이 늦춰진 건 진실일까? 이 메시지에는 왜 사과의 내용이 없을까? 주말 동안 수차례 보냈던 수정사항들은 과연 반영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난 잠시 회의실을 나가 P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는 다시 회의실에 들어가 대표와 직원들에게 K와 연락이 됐으며 마감이 늦춰져 사업계획서는 제출이 될 거라는 사실을 전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커다란 문제가 해결됐다며 기뻐했다.
오후 5시, 주말근무를 핑계 삼아 회사를 좀 일찍 나섰다.
버스를 타고 아직 한산한 강남을 벗어날 무렵, Y에게서 전화가 와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Y는 P의 이야기를 꺼냈다. 둘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P, 참 대단해요."
"예?"
"P, 아버지가 토요일에 돌아가셨잖아요."
"정말요?"
"말 안 하던가요?"
"예. 금요일 오후부터 K와는 연락이 끊겼어요. 오늘 오후에 겨우 제출한다는 메시지를 받았구요."
"아... 정신없어서, 나중에는 미안해서 말을 못 했을 거예요. 오늘 발인 마치고 바로 사무실 와서 사업계획서 마무리해 제출한 거 같아요. 참, 사업이란 게 어렵네요. 이런 시기에 맘껏 슬퍼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
Y와 통화를 마치고 얼마 안 있어 P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래도 책임진 일이니 사업계획서를 빨리 마무리를 해 연기된 마감에 늦지 않게 제출했다고. 미안하다고.
핸드폰 화면을 끄고 나도 모르게 손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버스는 어둑해지는 한강 대교 위를 천천히 달리고 있었고 내 마음은 반대편 차선의 정체된 차들처럼 묵묵히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내가 느끼는 건 화도 슬픔도 후회도 미안함도 무엇도 아니었다. 무슨 마음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대교 밑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는 지상의 옥신각신함에 관심 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 달 뒤, 나는 P로부터 메일 한통을 전달받았다.
‘축하합니다. AI바우처 지원사업 서류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다음 발표 평가 일정은...’
여전히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이 소식을 접한 나를 제외한 직원 모두는, 순수하게 그리고 지극히 기뻐할 뿐이었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