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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7. 2024

인상 좋은 발표자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무대에 설 수 있게 되기까지

내 초연 무대, 아니 첫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이었다.


넓은 회의실엔 두 명의 관객(클라이언트)과 두 명의 배우(나와 이사님)가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뚜벅뚜벅 무대에 올라 홀로 섰다.


"시작하시죠."


"아, 예, 예. 그, 그럼 지금부터 M사의 가전 브랜드 사이트 구축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리모컨으로 제안서의 첫 페이지를 딸깍 넘기자마자, 설국(雪國, 눈의 나라)처럼 눈앞은 하얘지고 머릿속은 까매졌다. 의식은 금세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냥 장표를 읽어야지 생각했던 게 떠올라 장표를 읽어 내려가다 생각보다 장표 한 장에 텍스트가 많다는 걸 깨닫고 어느 부분을 생략하고 읽을까 고민하면서 그래도 시간을 끌면 안 되겠지 하는 생각에 일단 볼드로 표시한 부분만 읽자고 생각하고 띄엄띄엄 읽다 보니 문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음'체잖아? 깨닫고 보니 이 페이지는 대충 얘기를 다 한 거 같아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다시 한눈에 전체 내용이 들어오지 않아 맨 위 타이틀부터 읽다 보니 이러다 다섯 페이지만에 발표 시간이 다 끝날 것 같아 걱정돼 흘낏 객석을 보니 관객 한 명은 전화를 받고 있고 더 나이 있어 보이는, 아니 부장님이랬나? 그의 벗어진 이마가 조명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것 같은데 시선을 내리니 그의 매서운 눈이, 아니 저 눈은 한심하다는 눈인가?'


"제가 이어서 발표를 하겠습니다!"


갑자기 이사님이 손을 번쩍 들고 무대에 등장했다. 구원 등판이었다. 하지만 제안서를 숙지하지 않은 탓에 대사는 유려했으나 내용은 빈곤했다. 그는 결국 샛길로 빠져 가전 업계의 녹슨 트렌드만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첫 공연은 막을 내렸다. 이사님은 너무 익은 토마토처럼 붉은 얼굴로 평소보다 훨씬 커다란 영업용 미소를 지었고 난 5톤짜리 쇳덩이를 머리에 얹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사님은 예의상 객석의 부장님에게 혹시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질문은 없고, 어, 앞쪽 발표하신 분 인상은 좋네요."


내 첫 프레젠테이션은 '인상 좋은 발표자'라는 별명만 남기고 성과 없이 끝났다. 




발표 며칠 전에도 눈앞이 하얘지고 머릿속이 까매지는 증상(이하 설국 증상)을 겪었다. 


주간 팀장회의에 대표님이 갑작스레 방문해 제안 준비 상황을 물어보셨다. 


"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몇 마디 꺼내지 못하고 내게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설국 증상이 찾아왔다. 2분의 정적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다음 팀장의 현안 공유로 이어졌다. 


에이 설마 그 정도일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난 에이전시에 오기 전인 30대 초반까지 발표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는 행동이 무서웠다. 대학교 때는 앞에 나서야 하는 수업들(토론, 교양댄스 등)은 무조건 피했고 전공의 조과제는 문서 작성만 전담했다.


마지막 학기 전공과목에도 발표과제가 있었는데 재수강이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절망했다. 그러다 나 같은 솔로 복학생을 발견하고 그와 조를 짰다. 난 그에게 제안했다. 문서는 내가 다 작성할 테니 발표만 해주라고. 발표 날, 자료는 완벽했으나 발표자가 그 '훌륭한 자료'를 본 건 수업 시작 30분 전이었다. (전성기 연예인처럼, 그를 뵙는 건 정말 힘들었다.) 


당연히 발표는 엉망이었다. 발표 후 질문이 들어왔을 때 난 1분의 정적을 참지 못하고 "제가 답하겠습니다!" 라며 나서고 말았다. (아, 이게 내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구원등판한 이사님의 심정이었으려나?)


답을 하는 내 상태는 처참했다. 목소리는 강도 7의 지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졌고 다리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설국 증상의 첫 경험이었다. 답변을 끝냈을 때 강의실 학생들은 나를 마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처럼 보고 있었다. 내 답변의 퍼포먼스는 그만큼 비장했다. 


내가 말한 건 겨우 '두 국산 경차 브랜드의 광고 콘셉트 차이점'이었다.




첫 프레젠테이션 이후 더 이상 발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걸 깨달았다. 집에선 가장이었고 회사에선 팀장이었다.  발표를 회피하면 가족도 팀원도 굶어야(좀 심한가?) 했다. 난 진화를 결심했다. 그리고 한동안 여러 발표 관련 서적들을 보며 이런 나라도 발표를 해낼 수 있는 방법을 탐구했다. 

그렇게 쌓아온 '수줍고 인상 좋은 발표자'의 노하우는 아래와 같다. 


1. 제안서는 맥락이다

프레젠테이션 스킬에 대한 책을 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7페이지의 법칙'을 말한다. 아무리 제안서 내용에 대해 열변을 토해도 듣는 사람이 기억하는 건 7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는 것. 즉 기억할 수 있는 양이 한정적이란 말이다.


해결책은 '맥락'이었다. 그리고 맥락의 핵심은 '문제'와 '해결책'이다. 클라이언트가 제안을 요청했다는 건 그들에게 전문기의 손을 빌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순서로 제안서를 짜게 됐다.


(1) 트렌드
- 제안하려는 내용과 밀접한 그리고 최신의.

(2) As-Is
- 당신들이 현재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큰일 난다는 위기감을 줘야 한다. 
- RFP(제안요청서)에 그들이 정리해 놓은 문제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참고는 하되 나름대로도 분석해 봐야 한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수주한 프로젝트도 여럿이다.)

(3) 솔루션
- 해결책은 콘셉트로 제시한다. 너무 구체적이지는 안 돼 추구하는 변화의 내용을 싸잡아 하나의 키워드, 혹은 문장으로 정리해야 한다. 
- 콘셉트를 얘기한 뒤 주위를 둘러보라. 그들이 As-Is의 위기감에서 벗어난 듯 개운한 표정이라면 승부는 난 것이다.

(4) 제안 세부 내용
- 여기는 정말 세부적인 내용을 적는다. 클라이언트들이 점수를 매기는 평가요소에 대한 응답은 빠짐없이 넣도록 한다. 다만, 세부 내용은 앞서 얘기한 솔루션의 콘셉트와 연결돼야 하며 중간중간 이 연결고리를 상기시켜 줘야 한다.


2. 제안서는 대본이다

여전히 설국증상은 나의 일부다. 그래서 제안서 포맷을 아예 대본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사는 각 장표에서 가장 폰트가 큰 '타이틀'이다. 여기에는 내가 이 장표에서 하고 싶은 딱 한 마디를 나의 말투로 적어 놓는다. 열심히 발표를 연습지만 현장에서 또다시 설국상태가 됐을 때 난 장표의 타이틀에 집중한다. 그 대사 한마디에 뒤의 말들은 굴비처럼 엮여서 흘러나온다. (연습을 충분히 했다면!)


3. 제안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발표를 하는 나도 듣는 그들도 결국 사람들이다. 그래서 제안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초반에는 유머를 가미한 인사를 던진다. 그리고 재빨리 썰렁한 농담에 반응을 보이는, 가능한 한 인상 좋은 사람을 찾는다. 중간관리자 급이면 가장 좋다. 

발견했나? 그가 당신의 타깃이다. 그냥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를 향해 제안해라. 일대일로 얘기하면 말이 훨씬 편하게 나온다. 다만 끝까지 그 사람만 보면 첫눈에 반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설마?) 발표가 막바지에 다다랐으면 어느 정도 편해졌을 테니 이제 시선을 돌려 맨 끝에 앉은 최고 결정자와 눈을 마주치며 마무리를 하자.


4.  스피커스 하이!

런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을 들어봤나? 힘겹게 뛰던 마라토너들이 어느 순간 맞이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심박수가 안정돼 지구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상태가 되는 시기'를 말한다.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도 그렇다. 편안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자 시절, 편집부의 인터뷰 방침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확보하라'였다. 그래야 인터뷰이의 깊은 속까지 침투할 수 있다. 능숙하지 못한 언어로 외국인과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방과 나의 링크가 딸깍 걸리면 언어의 벽을 무시한 영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데 그것도 초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제안 발표도 그렇다. 아무리 능숙한 발표자라도 긴장 속에서 시작한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스피커스 하이'에 도달할 수 있는지다. 위의 내용들 중에 이를 위한 장치들이 들어있다. 농담, 눈 맞춤, 구어체의 문서 등등, 최대한 무리 없이 스피커스 하이로 갈 수 있는 장치들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테니 자신만의 도구를 개발해 보길 권한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섭진 않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시행착오를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발표자들이 꿈꾸는 무대는 이렇겠다만... (그림 : 나)


풍파를 겪다 보니 거울을 보면 '인상 좋은 발표자'라는 말이 더 이상 내겐 어울리지 않는 듯해 아쉽다. 이젠 피부관리와 노화방지, 그리고 마음 관리가 필요한 나이가 돼버렸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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