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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7. 2024

그때 우연히도 나는

우연을 잘 받아들이는 성향

‘계획된 우연'이라는 이론이 있다. 


'미국 상담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존 크럼볼츠(John D. Krumboltz.) 박사가 발표한 이 이론은 인생을 살아가며 군데군데 놓인 우연적 기회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성향' 혹은 '학습기술'을 다루고 있다. 


연구를 위한 조사에서는 대학생에서 직장인들까지 진로를 정하는 데 우연적 사건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답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크럼볼츠 박사는 '우연을 잘 받아들이는 훈련, 혹은 성향을 키우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위한 학습 기술로 '호기심', '인내성', '유연성', '낙관성', '위험 감수' 등의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20대 시절 내게도 우연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궁금했고 참아냈으며 어떻게든 되겠지라 생각했던 20대의 내 진로는 그 맥락 속에서 시작됐다. 


1. 외상을 갚기 위해 학교 앞 재즈바에서 심야 시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교 2학년 때인 1995년, 난 등 떠밀려 미술 동아리 회장을 맡았다. 봄 전시회를 앞두고 학교 앞 가게들을 돌며 전시회 스폰서를 구하는데 신장개업한 어느 재즈바 사장님이 통 크게 가장 큰 광고상품을 구매해 줬다. 고마운 마음에 전시회 뒤풀이 2차로 그곳에 갔다. 하지만 선배들이 후원금을 내지 않고 죄다 사라진 탓에 15만 원의 외상이 생겼다. 그리고 '한 달간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 딱 15만 원'이라는 사장의 말에 난 몸으로 때우기로 결심했다.


당시는 심야영업 규제가 있어 밤 12시 이후 영업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꼭 그 시간에 찾아오는 단골들을 돌려보내지 못했던 사장님은 문을 걸어 잠그고 특별한 신호를 보내는 단골들을 받았다.


외상은 한 달 만에 갚았다. 하지만 매일 같이 범상치 않은 단골들을 만나면서 난 '긴 시간 동안 하나의 장소, 혹은 집단을 관찰하며 작성해야 하는 문화인류학(수강 중인 교양과목) 리포트'를 그곳에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2학년 1학기 내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2. 군대에서 문화 매거진을 보기 시작했다.

제대를 다섯 달 남긴 1998년, 흠모하던 동아리 선배가 문화 월간지 한 권을 생일선물로 보내줬다. 문화와 거리가 멀던 나였지만 선배로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연락을 받고 싶은 마음잡지가 너무 재밌다며 제대 전까지 매달 그 잡지를 받아 볼 수 없냐는 의사를 전했고, 선배는 수락했다. 


제대 후에도 매달 지하철 가판대에서 그 매거진을 구매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3. 시간을 때우려 무라카미 하루키(책)를 만났다.

제대 후 복학 전까지 딱히 할 일이 없어 집에서 빈둥거리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도서관에 가서 책이라도 읽으라며 등짝 스매시를 날리셨다. 그날 시립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처음 만났다.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을 한 작가의 소설 몇 권을 읽다 보니 문득 나도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복학 후 일상에서 얻은 소재로 몇 편의 짧은 픽션을 쓰게 된다.


4. 일본어 학원 수강증을 공짜로 얻었다.

복학 후 처음 맞이한 추석에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던 형 친구는 내게 일본어 학원 수강권을 공짜로 넘겼다. 강남에 새로 문을 연 어학원에서 대폭 할인된 1년 수강증을 덜컥 사버렸는데 아직 한 번도 안 갔고 앞으로도 갈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나라도 다니라고 했다. 


덕분에 딱히 관심 없던 일본어 공부를 난데없이 시작한다. 


5. 일본 워킹홀리데이 모집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대학교 졸업 전 마지막 1년을 남긴 시점에 난 취업을 위해 준비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학점도 바닥이고 자격증도 인턴 경력도 하나 없었다. 뭐라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무작정 휴학계를 냈다. 며칠 뒤, 진로 상담을 핑계로 선배들과 동아리방에서 술 한 잔 하고 캠퍼스를 내려오다 한숨 쉬며 올려다본 하늘에서 '일본 워킹홀리데이 지원자 모집' 플래카드를 발견한다. 


그날부터 난 워킹홀리데이 비자 지원 준비를 시작한다.


6. 그 매거진에 기자 아카데미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휴학 후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 가판대에서 문화 매거진을 구매했다. 그리고 지면에서 '기자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발견한다. (이 아카데미는 그 해 딱 한 번 운영됐다.) 




휴학의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기자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일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따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 뒤 6개월 동안 난 무척 절제된 생활을 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 일본어 학원의 첫 수업을 들은 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귀가 후에는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기자 아카데미 지원을 준비했다. 이어진 우연들이 선사한 건 작은 씨앗들이었고 싹을 틔우는 데는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두 달 동안 준비해 기자 아카데미 공모에 지원했다. 지원에 필요한 건 증명사진 한 장, 자기소개서와 직접 취재한 기사 형식의 글이었다. 


(1) 자기소개서 
잡지사 편집부의 특이한 취향을 고려하면 평범한 자기소개서는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끄적였던 픽션 중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작성한 글을 골랐다. 그 앞에 자기소개서란 타이틀과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꾸미지 않은 내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1인칭 시점의 픽션을 보낸다고. (살인자가 등장하는,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2) 기사
기사는 앞서 말한 '재즈바 심야 단골 관찰기' 문화인류학 리포트를 손봐서 제출했다. 그 단골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혼자 와서 자신이 키핑해 놓은 위스키를 홀짝이다 가는 여자 회사원, 올 때마다 다른 외국인 남자 친구와 동행하는 젊은 여자, 재즈바인데 락을 틀어달라며 CD를 챙겨 오는 아저씨, 재즈바 앞 파출소에 근무하는, 사장 누나를 흠모하던 경찰관 등이었다.


그해 7월의 어느 날 워킹홀리데이 3차 심사 합격 통지를 받고 오는 길, 여의도역 지하철 가판대에 새 매거진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합격자 공지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다. (경쟁률이 무려 25대 1이었다.) 난 지하철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환호했다. 사람들이 황급히 물러나 흘끔거릴 정도로. 


이렇게 우연의 씨앗들은 모두 싹을 틔웠다.


우연은 그저 씨앗이다,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다.




크롬볼츠 박사의 계획된 우연 이론의 학습 방식에 개인적으로는 '개방성'이라는 한 가지를 더 얹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 20대에 무언가를 꼭 이루겠다는 강박이 있었다면 우연이란 변수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난 열려있었고 우연한 기회들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는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선, '대책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만 그땐, 그리고 나는 그랬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 빡빡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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