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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휘서 Jul 16. 2020

미니멀 라이프 버리기 _ 이것까지 버려야 합니다


곤도 마리에의 정리 법칙에 따라 옷과 책 버리기를 실천했고 이제 다음 단계인 서류와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넘어가야 했다.

돌아보면 옷과 책은 뒷단계에 비해 난이도가 쉬운 편이었다. 둘 다 부피의 압박이 큰 물건이라 덜어낸 후의 기대효과로 박차를 가하게 된다. 유행과 취향에 영향을 받는 종류이기도 해서 훗날 새 옷과 책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문제는 3단계인 서류부터이다. 앞 단계에 비해 부피가 크지 않으니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 영역에 들어선다. 추억과 역사라는 대체품이 마땅치 않은 고심의 단계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서류 -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곤도 마리에가 쓴 서류라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하기에 이제부터 자료라고 지칭하련다. 종이류부터 카탈로그, 팸플릿 등 다양한 자료를 헤아려보니 중형 트렁크 2개 분량이 나왔다. 버리지 못한 성향도 크고 공부한 시간도 길며 글 쓰는 직업이다 보니 종이 자료가 확연히 많았다.

대학 때부터 모인 강의록, 논문 및 일을 위한 각종 자료가 트렁크 2개 분량이 있었다.


모아놓고 보니 프린트 자료, 잡지와 신문에서 발췌한 기사, 각종 패션 행사에서 받은 보도자료 및 홍보용 책자, 강의록과 논문, 퇴고용 원고 등 차곡차곡 쌓인 자료가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대변했다. 10여 년이 넘는 나의 기록 역사이기도 했다. 왠지 자료를 버리면 그 시절을 영영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눈망울을 반짝이며 듣던 대학 시절 첫 수업이 생각나고 친구들과 함께 수다 떨며 밤새도록 만들었던 과제의 밤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내가 보였다. 함께 한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추억을 복기하는 날이 1년에 몇 날이나 될까? 결국 자료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짐 덩어리로 앞으로도 집 한쪽 공간을 묵직하게 차지할 터였다. 이를 보관할 수납장도 딱히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트렁크 안에 담아둘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정리가 답이었다.


8월의 무더위가 저녁나절까지 후끈한 열기를 더하던 어느 날, 선풍기를 세게 틀어놓은 채 바닥에 모든 자료를 펼쳐 놓고 차근히 고르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자료를 보관해 왔구나.’ 대학 1학년 때 좋아했던 국어 수업의 강의록은 주별로 있었고 교양수업 조별 발표 자료부터 맘에 드는 화보, 영감을 주는 각종 시안이 가득했다. 이를 소중히 보관해 온 나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잠시 웃음 짓기도 하고 온화했던 교수님의 눈빛과 수업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결연한 마음을 먹었다.


산이 되어 버린 많고 많은 자료를 1/5로 줄이기로 했다. 미련을 하나씩 내려놓다 보니 빠르게 줄어갔다. 두 트렁크 분량이 한 뼘 가량으로 확 줄었다. 1/5이 목표였는데 1/15로 줄어든 셈. 이 엄선한 자료도 일정 기간 볼일이 없다 싶으면 후에 더 줄일 수 있겠지. 나의 시절과 담담히 이별하는 법을 이 날 처음으로 익혔다. 그것도 대량으로.

줄이고 줄인 후의 모습. 책장 반 칸 정도를 차지한다.


소품 _ 한때 애정 했던 애착의 물건

작고 예쁜 물건을 좋아한다. 문구점과 디자인 숍 구경을 즐기며 특히 수첩과 무지 노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구경하며 만지작거리기 일쑤이다. 화장대 위에 놓을 만한 작은 소품을 좋아해 각 여행지마다 그 나라의 특징을 반영한 작은 상징물을 사 오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집 안 곳곳에 놓인 소품이 사는 순간에 느꼈던 기쁨을 지속적으로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을 하면서 받은 각종 론칭 행사 및 프레스용 답례품 또한 생각만큼 생활에 유용하지 않았다.


요즘 '예쁜 쓰레기'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설렘 가득했던 물건이 결국은 버려질 운명임을 함축한 말이 아닐까? 한때 반했으나 무용한 물건들이 쌓여간다. 결국 휴지통 속으로 들어갈 운명이지만 결코 쓰레기라 부르고 싶지 않은 물건이 가득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4단계에 돌입했다.

고심해서 고른 3남매 포크, 막상 사용해 보니 사과 한쪽도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혹해서 사 온 몇몇 물건을 살펴보자. 도쿄 여행 때 Loft 매장에서 사 온 포크 3남매. 아기자기한 디자인과 패턴이 쏙 마음에 들었던 제품이다. 도쿄발 기념품을 펼치는 나의 꾸러미에서 이 포크를 보자마자 엄마는 "딱 너 같은 거 사 왔네~."라고 하셨다. 그러나 막상 사용해 보니 실용성이 심히 떨어졌다. 포크 끝이 무디고 안으로 휘어져 있어서 과일 한 조각 제대로 집을 수 없었다. 역시 포크는 쇠붙이임을 철저하게 깨우쳤다.

일본 Loft 매장은 온갖 예쁜 제품들이 모여있는 토털 팬시점으로 한국인들이 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곳. 이곳에서 편지지와 카드, 기내용 트렁크 등을 샀는데 나머지는 틈틈이 아주 유용하게 써왔다. 포크의 교훈에 힘입어 앞으로는 실용성을 꼼꼼히 따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까르띠에 프레스 행사 때 받은 오르골. 이제껏 받은 프레스용 선물 중 신박했던 아이템으로 손에 꼽는 물건이다.


까르띠에 프레스(Press) 행사 때 기자들에게 나눠주었던, 리본 사이로 표범이 까꿍 하는 미니 오르골도 처분했다. 가끔 태엽을 힘껏 감았다 놓으면 영롱한 음의 ‘징글벨’이 반박자 빠르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왠지 모를 위안이 되곤 했는데 이 역시 크리스마스 시즌이 가까워질 때나 몇 번 들을까, 1년 중 다섯 날도 듣지 않았다. 오르골은 독서모임 연말 행사에서 안 쓰는 물건 교환식에 내놓아 새로운 주인을 찾아갔다. 다만, 그 소리가 그리울 수도 있으니 30초짜리 영상으로 남겨놓았다. 행여나 생각날 때면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이런 식으로 저마다 추억을 품은 물건을 다수 비워냈다.


소품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생활용품으로 눈길을 돌렸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과 쓰임이 분명 있지만 여러 개라 줄이기가 필요한 것이 대상이었다.

안 쓰는 향수 여럿, 고데기, 압축팩,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 팔만한 물건은 중고 사이트에 내놓아 모두 새 주인에게 보냈다.

어쩌다 보니 충전기만 4개.. 다들 이쯤 있지 않나요?


알게 모르게 수가 늘어난 물건을 둘러보았다. 2~3년마다 바뀐 핸드폰을 따라 전입한 하얀색 충전기가 4개나 되었고 TV, 인터넷, 모니터 등 각종 전자 제품 부속품을 한데 모아보니 작은 상자에 가득 담겼다. 충전기는 제조일자를 보고 가장 최신 것 두 개만 남겼고 안 쓰는 부속품도 모조리 버렸다.

나도 모르게 쌓인 충전기처럼 손톱깎이도 네 개나 있어서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작별했다. 비슷한 류의 가위, 칼, 자 등도 같은 방법으로 정리하니 한결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각종 샘플, 크고 작은 공병 모음, 오래된 화장품 등도 분리수거하거나 비워냈다.


옷과 책에 비해 확실히 부피는 작았지만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비워내니 공간마다 숨통이 트였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도 옹기종기 모여 한 뭉텅이씩 차지했던 수납공간이 하얗게 바닥을 드러냈다. 주방 서랍, 신발장 선반, 화장품 보관함 등 곳곳에 여유 공간이 되살아났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대번에 안다는 말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물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추억의 물건_ 엄선할 것

가장 어려운 분야가 아닌가 싶다. 추억을 꽤나 소중히 여겨서 어렸을 적부터 소소한 물건을 아주 착실하게 모아 왔다. 그 물건이 없다면 아득했던 꼬꼬마 시절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추억의 물건을 모두 버릴 수는 없다고 타협하고 버릴 수 있는 것 위주로 정리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사사키 후미오는 편지와 사진 등 추억의 물건을 스캔해서 문서화하고 모두 버렸다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곤도 마리에가 물건을 버리는 기준을 ‘설렘’으로 잡아 관용을 베푼다면 나는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게끔 만드는 물건만큼은 버리고 싶지 않았다. 5살 때부터 죽마고우인 D가 내게 준 200여 통의 편지를 어찌 휴지통으로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매주 고심해서 골랐을 편지지의 촉감과 친구의 기분 따라 미묘한 변화가 있는 글씨체가 눈 앞에 현존하는데! 이런 소중한 물건은 예외로 두었다.


대신, 옅은 추억과 한 때의 취향이 담긴 물건은 버리기로 했다. 대학 때 남자 친구가 뽑기로 준 스누피 인형, 남동생과 내가 좋아했던 노란 우비 소녀 인형을 방에서 들어냈고 언제부턴가 듣지 않게 된 지난 CD컬렉션도 한꺼번에 비워냈다. CD플레이어도 사라진 세상, 한 아이돌 그룹에 열광했던 학창 시절의 산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좋아하는 나라인 모로코에서 가져온 기념품 또한 레이더망에 걸렸다. 모로코의 전형적인 건물 풍경을 형상화한 액자 여러 개, 훗날 나만의 공간이 생기면 한쪽 벽에 칠하려고 구입했던 강렬한 색감의 가루 염료(5KG나 되다니), 정확한 용도도 모르면서 사 온 아리따운 실로 싸인 공예품 등. 여행의 기분에 혹했던 물건이지만 일상에서는 대부분 쓸모가 없었다.


한편 정말 소중한 물건은 남겼다. 어린 안목으로 담아온 조잡한 기념품은 대부분 비웠지만 딱 하나, 태국에서 사 온 파란 코끼리 인형은 남겼다. 공항 면세점에서 한눈에 반해서 계속 만지작거렸더니 이를 지켜보던 엄마가 주신 선물. 남아 있는 태국 돈이 없었는데 원화로도 계산이 가능하다는 직원 말에 비싼 환차에도 아랑곳 않고 단번에 계산하셨더랬다. 인형 갖고 놀 나이는 훌쩍 지났는데도 딸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기어이 사주고야 마는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고 싶어서 이 인형만큼은 남기고 싶었다. 따로 떨어져 사는 만큼 엄마를 연상케 하는 물건 하나쯤은 곁에 두어도 괜찮지 않은가.

엄마의 사랑을 함축한 코끼리 인형은 남겼다.


사람과의 추억이 있는 물건은 사진으로 찍어 이야기와 함께 블로그에 공유했다. 가끔 글을 클릭해 그 시절을 상기한다. 꼭 소유하지 않아도 기억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집 안 어딘가에 있으나 1년에 한 번도 꺼내지 않아 잊힌 물건이 되는 것보다 글과 사진으로 언제든 추억하는 편이 나의 시절을 향한 예의를 더 지키는 길이 아닐까.


추억의 물건까지 정리하고 나니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떠올랐다.


‘이 집안에서 대부분의 물건을 정리하고 몇 가지만 남겨야 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같은 제품으로 구입 가능한 물건을 제외하니 필름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동안 여행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필름.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그때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없으니 유일무이한 시간의 모음이다. 그 날의 온도와 바람, 햇살을 담은 소중한 컷의 컬렉션. 100여 통에 이르는 필름을 이번 기회에 찍은 순서별로 라벨링 하면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불필요한 것은 비우고 걷어내니 정말 아끼고 싶은 것이 단번에 보였다. 소중하게 남은 물건을 가까이하며 정성을 쏟는 일이 곧 미니멀 라이프로 가는 길임이 선명해졌다.


10여 년의 여행 역사가 담긴 필름은 정말 소중한 물건으로 남았다.


5단계에 걸친 한 차례의 버리기를 경험하고 나니 자연스레 나만의 수칙이 자리 잡았다.  


1. 현재 입는 옷의 양이 두 행거를 넘지 않는다.

2. 꾸준히 탐독하되 책은 150권 이하로 소장할 것. 신중히 소유하고 끊임없이 순환시킨다.

3. 프린트된 종이는 되도록 만들지 않는다. 행여 생기더라도 파일로 저장한 후 폐기할 것.

4. 순간 예뻐서 혹하는 작은 소품, 기념품 등은 웬만하면 사지 않는다.

5. 추억은 물건이 아닌 사진으로 남긴다.


과거는 소중하지만, 물건을 껴안는다고 해서 지난 과거를 다 움켜쥘 수는 없는 법.

정말 소중한 물건은 간직하되, 나머지 물건과는 쿨하게 작별하는 법을 익혀나갔다. 처음부터 쿨한 순 없었지만 시작이 어렵지 한 두 번 하다 보니 이 방법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려보면 알게 된다.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해서 몇 번이나 버리기 망설였던 물건이 막상 버린 후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의 현재에 영향을 주지 않는 물건이라는 걸 체감한다. 과거의 물건에 공간을 어정쩡하게 내어주기보다는 현재를 위한 공간으로 재편하는 편이 낫다.


물건을 한 번에 버리기 어렵다면 자료 1/5로 줄이기, 전자 부속품 1/2로 줄이기 등 특정 수치를 정해놓고 1차 버리기를 시도해 보기를 추천한다. 한 번에 완벽하기 힘들고 내 물건에 모질기는 누구나 어려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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