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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의 온도, 거칠고 치열한 서울 생활 사이에서

피세권이라고 아시나요?

by 타이완짹슨

한 번은 유튜브에서 할머니가 방학을 맞이하여 강원도 시골까지 놀러 온 손주들을 위해서 피자를 만들어 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문제는 할머니가 피자라는 음식을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었단 것이었다. 그래서 피자를 '자피'로 발음하는 등 웃지 못할 장면들이 짤로 떠돌았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듯했다.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것은 피자도 파전도 아니었지만 감동은 결과가 아닌 따뜻함으로 가득한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플이 아닌 전단지 속 사진만으로 손주들을 위한 피자를 만드셨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를 애정해 주시던 외할머니가 떠 올랐다. 더 이상 곁에는 안 계시지만 나의 유년시절 대부분을 채워주신 커다란 존재. 그리고 그 시절 어른들이 그러하듯 외할머니도 내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이려고 노력하셨던 기억이 선하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경동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달달한 곶감부터 제출 과일 하물며 길거리에서 파는 구워주는 가래떡까지. 하지만 그 많은 메뉴 중에 피자라는 음식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외할머니도 피자가 무엇인지 잘 모르셨던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LGkFLMgdFB4

<쇼츠 짤들이 많이 돌고 있는데, 원본은 KBS 다큐에서 볼 수 있다>

그 사이 시대는 빠르게 바뀌었다. 눈만 돌리면 카페가 보이고, 어플 하나로 원하는 음식은 물론.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이제는 흔한 음식이 되어 버린 피자. 하지만 반대로 늘 내 곁에 있을 줄로만 알았던 외할머니는 이제는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쩌면, 시간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낯선 환경들이 삶의 편의성은 증대시켜 주었지만, 소중한 것들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 버리는 것.

어릴 적 외할머니의 본가에서 머물던 불암동(육군사관학교 근처)은 허허벌판 그 자체였다. 주변은 대부분 배밭이었고, 한 동네는 모두 이웃사촌이었던 곳. 그러나 피자집은커녕 그 흔한 치킨집도 없던 곳.

그리고 약 30년 후, 현재 살고 있는 방이동에는 제법 많은 피자 가게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가끔은 "이 가게들이 다 먹고는 살 수 있을까?"라는 오지랖이 발동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선택지는 방이동 생활이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최애 피자 브랜드 1위 ~ 3위가 다 모여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곤 한다. 그중 하늘색 로고의 A 브랜드는 걸어서 불과 3 ~ 4분에 위치해 있어 늘 방문 포장을 하곤 하는데 그럴 경우 최대 3,000원까지 할인도 받을 수 있어서 알뜰한 소비가 가능했다.

생각해 보면 1년에 피자를 먹는 횟수는 고작 10번 남짓. 한 달에 한번 겨우 먹는 셈이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아주 사소한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 현재 동네 생활에 만족감을 더해주는 듯하다. 마치, 동네 친구들을 자주 만나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곁에 있으니까 괜히 든든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거리상 도보로 약 7 ~ 8분 거리에는 할인을 자주 하는 D 브랜드가 있다. 참고로 방이동으로 온 이후 이곳에서 주문 한 횟수는 딱 한 번임에도 불구하고, D 브랜드가 있어서 느껴지는 방이동 생활의 만족도는 다시 한번 상승하는 듯하다.

흔히 말하는 스세권(스타벅스), 다세권(다이소)이라는 상권이 있는 것처럼 내게는 피세권 같은 것이다. 그 외에도 1인 전용 피자 브랜드부터 중저가 브랜드까지 수십 개의 피자 가게가 난립? 해 있지만, 어차피 많은 인맥보다 중요한 것은 정말 나에게 필요한 몇 명의 친구인 것처럼. 가장 선호하는 1 ~ 3위가 인근에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아참, 3위는 내 또래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글로벌 P 브랜드이다. 마이클 잭슨이 생애 시절 가장 좋아했다는 피자이기도 한데, 현재는 매장이 많지는 않지만 이 또한 방이동에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진 시켜 먹어본 적이 없다.




피자의 온도

음식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의 온기'와 '누구와 먹느냐?' 일 것이다. 물론 따뜻한 음식을 혼자 먹는 것도 편안한 휴일을 누리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순 있겠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식사의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D 브랜드를 한 번밖에 못 시켜 먹었던 가장 큰 이유 또한 1인 가구 입장에서 D사의 피자는 조금 버거운 양이다. 그럼에도 한 번은 6조각까지 삼켰지만 마지막 2조각은 남겨지고 말았다. '정확히는 먹고 싶지 않을 만큼 식어버린 탓이 크다.'

어쩌면 피자의 온도는 우리네 삶의 온도와 맞닿아 있는 크기일지도 모르겠다. 애쓰면 혼자 먹을 순 있겠지만 먹는 속도가 푸드 파이터가 아닌 이상 피자의 온도는 조금씩 식어버릴 것이고 그로 인해 위에 올려진 따뜻한 치즈 또한 굳어버려서 피자 본래의 식감을 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배는 불러오면서 상대적으로 온도가 떨어진 음식은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래서 관계의 온도는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항상 따뜻하게 품어주면서 온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펴줘야 한다. 처음 한입 베어 물었던 따뜻한 피자가 내 삶에 잠시나마 행복감을 채워줄 때, 반대로 혼자 먹기에 너무 많아서 남아 버린 피자를 다음 날 식은 채 베어 물면서 아침을 시작할 때 밀려드는 혼자라는 공허함 사이에서 오늘도 다짐한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적정한 온도의 피자가 아닐까 싶다. 너무 뜨겁지도 않은 그렇다고 너무 식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 온도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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