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 무데
권은하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1년 2월 26일
요즘은 극우파가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만,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극좌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극우파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찾아보니 극우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히틀러를, 극좌파는 레닌을 꼽고 있다. 이러니 극좌파와 극우파의 차이를 더욱 모르겠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극단적인 정치 집단으로 요도호 납치사건을 벌인 일본 적군파, 중국 문화대혁명의 전위부대인 홍위병, 뮌헨 올림픽 테러를 일으킨 검은구월단, 엔테베 민간항공기 납치사건을 일으킨 독일 적군파가 강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극좌파의 대표적인 집단이다. 지금이야 나치즘, 파시즘 모두를 극우파로 부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들을 가리켜 극우파라고 부르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어디라 할 것 없이 극우파가 난리다. 나치즘, 파시즘뿐 아니라 백인우월주의, 국수주의, 내셔널리즘이 모두 극우파이고, 그들은 하나같이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앞세우며 혐오와 차별을 도구로 삼는다. 이쯤 되면 극좌파와 극우파의 경계가 어렴풋이 드러나기는 하는데, 그래도 나로서는 좌파와 우파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와 보수의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 지지자들이 프랑스 의회 의장석 오른쪽에 반대자들은 왼쪽에 앉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조지아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연구하는 저자 카스 무데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파가 준동하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향력이 미미한 정치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2000년을 기점으로 극우 활동이 ‘제3의 물결’에서 ‘제4의 물결’로 전환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을 출간한 2019년을 그 정점으로 여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인도 모디 총리, 브라질 자이르 대통령,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등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고 6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현상이 더 심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이야 신파시즘, 우익 포퓰리즘, 급진 우익, 대안 우파로 다르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극우파는 하나같이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앞세우며 차별과 혐오를 도구로 삼는다. 나는 워낙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극우파가 도구로 삼는 차별과 혐오가 내 삶의 한 영역을 무너뜨리고 있는 이상 그것을 외면하기 어려워졌고, 그래서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의가 되는가?> 하는 제목의 이 책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우익과 보수가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보수층이 곧 가진 자를 의미하는 시대에 놀랍게도 극우의 지지층은 저학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닥에 극우파가 도구로 삼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 사회의 주력이었던 그들은 산업혁명 이후 소수로 전락했으며, 그 전락을 부채질한 것이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화의 피해자라고 여기며, 그 피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혐오와 차별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불만과 대응 방식이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들의 이슈가 상품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정치세력, 그 상품으로 수익을 내려고 드는 언론이 이들의 행동을 정치화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모든 정치가나 언론이 극우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그들 역시 극우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극우가 잘 팔린다는 걸 애써 외면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 설명에 따르면 이미 극우를 상품으로 여긴 언론은 뉴스로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극우의 중요성을 부풀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고립되고, 소외되었으며, 규모도 크지 않은’ 신나치주의 같은 극우주의 단체가 사회현상의 심각한 요인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고. 언론이 극우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 만큼 뉴스로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극우 지도자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오히려 극우 정치인에게 ‘부당하게 공격받는 약세 후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덧입힌다는 것이다.
언론만큼이나, 오히려 언론보다 더 극우의 부상을 가속하는 요인으로 저자는 소셜미디어를 꼽는다. 이 책 출간 당시에는 그것이 화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미 그것과 함께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이 극우 부상의 원흉으로 꼽는 것이 되었다. 저자는 소셜미디어가 전통적인 언론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우회해 우익이 공개적으로 세력을 넓히게 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소셜미디어의 영향은 통로가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에코쳄버로서 반향을 거듭하게 만들어 그 효과를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지금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극우 확산이 이처럼 문제가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제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는 미국에서 오히려 극우의 확산 규모나 속도가 더 빠르다. 저자는 그 바탕에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
“의회는 종교를 세우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자유가 이처럼 신성불가침인 미국에서는 극단적인 조직과 연설조차도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저자는 독일연방공화국은 우익 극단론자에 너무 무력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대응으로 설립된 나라이다 보니 민주주의적 수단을 통해 극우의 재집권을 막는 데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내무부 장관이나 연방헌법재판소가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적대적인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우가 혐오와 차별을 도구로 삼는 바탕에는 민족주의와 이에서 출발한 가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여성은 어머니만으로 정의하며, 그래서 여성은 직업을 갖지 못하고 전업주부로서 가족을 지원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직업은 자녀가 장성한 이후에나 고려할 수 있는 것이고. 여성 취업률이 높은 북유럽은 이와 다르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여성 존재의 목적이 가족을 완성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는 역할로 정의한다. 여성을 위협하는 주요 위험인물로 외국인 남성을 상정해 외국인 혐오를 정당화한다. 동성애는 이성애 가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혐오한다.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나름의 논리는 인정할 만하다. 그 주장이 일관되게 지켜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상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이런 기준은 적용을 달리한다. 여성을 위협하는 주요 위험인물로 외국인 남성을 지목하지만, 거기에 백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성애 가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이미 LGBTQ를 문화로 받아들인 네덜란드에서는 이슬람이 이를 위협한다면서 이슬람 혐오를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결국 극우는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합리적이고 견고한 이념도 논리도 없는 셈이다.
극우 ‘제4의 물결’이 시작된 21세기 초반만 해도 미국이나 영국, 독일과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극우가 뿌리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신념을 회복하는 것이 요원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점점 신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간다.
저자는 극우가 혐오와 차별을 도구로 삼는 집단으로 여기면서도 워낙 우익이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평등을 계속해서 확대해 나가려는 좌익에 비해 우익은 불평등을 불가피한 사회현상으로 여긴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좌익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익은 자유시장을 유지해야 하는 보수 성향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좌익은 진보이고 우익은 보수라는 말인가?
나는 진보나 보수 모두 ‘인간다운 삶’을 지향한다고 믿어왔다. 다만 지향점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다를 뿐. 진보는 무리하더라도 하루빨리 지향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수는 그것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관점에서 자신을 보수로 여기고 있으며,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밀어붙여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상처뿐인 결과를 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진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저자는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좌익은 진보이고 우익은 보수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게는 저자가 설명하는 우익이나 극우는 보수가 아니다. 또한 극우와 극좌도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들 집단을 극우파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극단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그나저나 이 책을 통해 극단주의자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세력을 확산했는지,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폐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았는데, 정작 그에 대한 해결책은 언급된 바가 없어 당황스럽다. 미국더러 수정헌법을 고치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소셜미디어를 억제할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독일처럼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적대적인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억제할 수 있게 만들기엔 행정부나 입법부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