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판소리 탄생 연구

by 박인식 Mar 03. 2025

한상일

휴먼앤북스

2025년 1월 25일     


책 좋아하고 노래 좋아해서 이삿짐은 책 상자와 음반 상자가 절반이 넘었다. 정릉에서 홍은동으로, 홍은동에서 리야드까지 이어진 그 짐은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다. 잠시 서울에서 한숨 돌리고 돌아갈 줄 알았던 발걸음이 서울에서 영영 멈췄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아끼던 음반 일부를 후배에게 맡겨 놨는데,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가져다줘서 그나마 갈증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손에 넣은 건 건사하기 쉬운 CD와 DVD였을 뿐 LP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중 가장 아까운 건 <뿌리깊은나무>에서 출간한 판소리 다섯 마당이었다. 당대 명창의 소리도 그렇지만 함께 들어있는 사설과 해설집은 가히 문화재감이었기 때문이다.     


고생스러웠던 마지막 몇 년, 달빛 좋은 저녁에 불 끄고 창문 열어놓은 채 들었던 판소리 몇몇 대목이 큰 위안이었던 기억도 아깝고, 얄팍한 월급봉투를 쪼개어 판소리 전집을 월부로 샀던 시절의 열정도 아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도 그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판소리를 좋아했어도 완창으로 들어보지는 못했다. 짧아도 서너 시간, 길면 여덟아홉 시간 걸리니 그런 연주회를 찾기도 쉽지 않고 알아도 좀처럼 들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반도 몇 번에 나누어 들어야 했다. 며칠 전에도 서촌에서 중고제 판소리를 부른다는 분이 나온다고 해서 다녀왔지만, 그런 갈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짧아 몹시 아쉬웠다.     


최근에 <판소리 탄생 연구>라는 책이 발간되었다고 해서 정독도서관에 구매 신청해 보름 만에 받아보았다. 하나라도 없애야 할 나이에 책을 쌓아두는 것도 부담스럽고, 보아하니 전자책으로 나올 만큼 팔릴 것 같지 않아서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받았지만, 첫 장부터 책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기에는 너무 학술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저자 한상일은 소금과 대금 연주자로, 국립과 시립 국악단체의 음악감독을 수차 역임한 국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약력을 보면 직업이 음악감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국악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 그렇다고 해도 판소리 관련 책의 저자라는 건 좀 뜬금없어 보였다. 저자의 전문 분야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사와 박사 논문 주제를 모두 판소리로 잡을 정도로 분야 전문가라고 했고, 이 책은 그의 박사 논문을 그저 논문으로 묵히는 것을 아깝게 여긴 주변 인사들의 추천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판소리를 주제로 삼은 책이 발간된다고 해서 앞뒤 안 재고 골랐지만, 이 책은 판소리 연구 결과물이기는 해도 판소리 전반이 아닌 판소리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나는 판소리에 어떤 게 있고, 어떻게 나뉘고, 이름난 소리꾼은 누구고, 그래서 어떤 곳에 초점을 맞춰 들어야 하는지 알고 싶었는데. 물론 판소리가 태어나는 과정도 내 궁금증 안에 들어있기는 했다.     


저자는 판소리 탄생 배경을 문학적, 음악적, 연희(공연예술)적 과정에서 살펴보고 있다. 판소리 줄거리를 이루는 이야기는 문학, 창 자체는 음악, 발림과 너름새는 연기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특성을 보인 판소리가 전라도 세습무 집단의 하층 예술인들이 주체가 된 연희에서 출발한 것으로 판단한다. 굿에서 출발했다는 말이다. 굿은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창(노래), 아니리(대사), 발림 혹은 너름새(연기)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그대로 판소리로 옮겨온 것이다. 굿은 서사무가(敍事巫歌)와 서정무가(抒情巫歌)와 희곡무가(戲曲巫歌)로 이루어졌고, 그중 서사무가는 무당 자신이 북장단을 치며 부르는 구송창(口誦唱)과 반주자가 있는 연희창(演戲唱)으로 나뉘는데, 구송창은 신을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 연희창은 연희를 즐기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연희창에서 제의적 기능이 배제된 것이 판소리라는 것이고.     


판소리는 워낙 조선 후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공연 양식이다. 판소리는 무엇보다 이야기가 중요한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판소리는 모두 처음부터 한 가지 이야기였던 게 아니라 여러 이야기가 결합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춘향가>는 양반과 기생의 만남, 신관 사또의 횡포, 기생 수절, 암행어사 출두라는 별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것이라는 말이다. 거기에 그 이야기 줄거리와 연결되는 시조나 잡가, 민요, 무가, 가사가 덧입혀졌고. 저자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춘향가에 인용된 다른 형태의 예술 작품은 시조 12편, 십이가사 중 8편, 잡가 13편, 민요 20편, 무가 19편, 가시 1편 등 무려 80여 편에 이른다. 그렇다고 춘향가가 다른 것을 인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춘향가 일부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작품에 인용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적극적으로 포용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판소리라면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다섯 바탕이 알려졌지만 여기에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배비장타령, 숙영낭자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을 더해 열두 바탕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알아들은 내용이고 나머지는 읽기는 했으나 거의 또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판소리가 점점 쇠퇴해가는 걸 안타까워한 저자가 판소리 진흥책으로 내놓은 것 중 몇 개가 눈길을 끌었다.     


저자는 판소리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는 원인이 수련이 쉽지도 않고, 단기간에 끝낼 수도 없고, 끝낸다 한들 그것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를 계승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저자의 설명 중 눈길을 끈 것으로 다음 두 가지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공감할 만한 제안이다.     


저자는 먼저 판소리 다섯 바탕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줄거리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이것을 판소리에 거리를 느끼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판소리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출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니 판소리에 관심이 많은 나조차도 춘향가, 심청가 정도 줄거리를 기억할 뿐 수궁가, 심청가는 내용의 얼개만 기억할 뿐이다. 적벽가는 무슨 내용인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저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모든 건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 줄거리를 제대로 알고 들으면 판소리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한다.     


또 하나는 일반인들이 재미있다고 여길만한 판소리 대목을 대사(아니리)와 연기(발림 혹은 너름새)를 다듬어 짤막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창보다는 부분창 중심으로 바꾸어 일반인들이 쉽게 친숙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만들어진 판소리뿐 아니라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감각으로 신작 판소리를 만들어야 판소리가 계승 발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신작 판소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건 아니다. <안중근 열사가>, <윤봉길 열사가>, <유관순 열사가> 같은 열사가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광주항쟁을 다룬 <그날이여 영원하라>는 신작 판소리가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판소리가 대부분 비장함을 주제로 삼고 비극적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관객의 관심을 얻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와 같은 비장함과 비극적 결말에 판소리의 가장 큰 매력인 해학과 축제를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판소리 한 편을 바탕이라고 표현했다. 어디서는 바탕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마당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그 두 가지 용어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어서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지도편달을 아끼지 마시라. 복 받으실 터이니.          



매거진의 이전글 마포 주공아파트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