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와인의 확립, 그리고 그 이후
1453년, 영프의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약 30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던 보르도 지방은 프랑스 왕가에 귀속된다. 이 백년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르도는 봉건사회에 있어서 나름 자치를 인정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가에 귀속이 되고, 절대 왕정으로 가는 과정에서 보르도는 오히려 영국령이었던 시절을 향수하곤 했다. 결국, 1458년부터 1675년까지 프랑스 왕가에 대한 지배에 꾸준히 저항을 했다. 반골기질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고객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떠난 상태.
그래서 그들은 이제는 영국보다는 북유럽 쪽 시장을 개척을 하기로 하고, 북유럽 도시 연맹 한자동맹과의 비즈니스였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상인이 보르도에 정착을 하게 되고, 이 한자 동맹 도시 중에는 런던도 있었다. 즉, 영국으로 수출이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 것이다.
보르도, 간척사업으로 발전하다
16세기 보르도의 와인이 인기가 높아지자 생산량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르도 입장에서는 와인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타이밍이 왔다. 하지만 땅은 한정되어 있는 셈. 지금 포도를 만든다고 바로 와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포도 재배에 1년, 그리고 와인 제조에서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은 걸렸다. 그러자 보르도인은 자신들의 와인을 팔아주는 네덜란드 상인과 협업을 한다. 그러자 여기서 네덜란드인 다운 발상이 튀어나온다. 바로 땅을 새롭게 만들자는 것. 네덜란드인의 특기인 간척사업인 것이다. 대서양으로 연결된 지롱드 강의 일부인 늪지대 주변을 매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인은 이곳에서 땅을 매립하기 시작한다. 원래 백년전쟁 당시 이쪽은 강을 바라보는 요새가 있던 곳. 이 요새가 있는 곳들이 이제는 포도밭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재배된 충적토는 포도재배에 최적화되었고, 물이 빠져나가자 자갈 토양이 드러났다. 배수가 잘되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매립한 이 땅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들이 나오게 된다. 샤토 무통 로칠드(Ch. Mouton-Rothschild), 샤토 마고(Ch. Margaux),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Ch. Lafite-Rothschild)가 있는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 메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이러한 메독의 역사는 의외로 짧은 것이 특징이다.
지금과 달랐던 보르도 와인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보르도 와인은 지금과 무척 달랐다는 것이다. 15~16세기 이전의 와인은 클라렛(clairet)이라고 하여 선분홍색의 로제 와인 같은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늘 같은 것을 마시면 질리는 법. 1533년에 장드폰택(Jean de Pontac)이 보르도 시 남쪽의 그라브 지역에 와이너리를 세운다.(장 드 폰택은 네덜란드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샤토 오브리옹(Ch. Haut-Brion)의 시작이다. 이 와이너리에서 진한 붉은색, 흔히 이야기하는 바디감 있는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이러한 모습이 보르도 와인의 스타일로 확립이 되고, 이전의 클라렛 와인이 질긴 영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탑 와인으로 부상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은 육류소비가 증진되면서 지금의 타닌감 높은 와인이 선호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산업혁명이 시작하던 18세기, 더 이상은 가축 등이 농업에 적게 사용되면서, 육류에 대한 소비가 급격하게 증가한다. 특히 영국은 소고기를 먹는 것이 영국인의 자부심이라는 느낌으로 적극 권장한다. 지금의 레드 와인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즉, 지금의 보르도 레드 와인 스타일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공식 포도주 분류법을 제정, 메독 지역을 중심으로 6000여 개의 와이너리 중 탑 1%에 속하는 와인을 선출한다. 그렇게 선출된 와인이 1등급 와인이 총 4종, 샤토 마고(Ch. Margaux),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Ch. Lafite-Rothschild), 샤토 오브리옹(Ch. Haut-Brion)이다. 여기에 2등급이었던 샤토 무통 로칠드(Ch. Mouton-Rothschild)는 1973년에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을 하게 된다. (샤토 오르리옹은 메독에 속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프랑스혁명에서 보르도의 와인 관계자들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세계적인 와인 작가 휴 존슨(hugh johnson)의 와인 이야기(The story of wine)에 따르면 프랑스 대혁명의 촉매제가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전에 이미 와인 관계자들의 봉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와인 밀수업자들이 이끄는 민중이 관세문을 습격했던 것. 그 연장선상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이뤄졌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관세문이란 특정 제품을 가지고 파리 시내로 들어가면 관세를 물렸던 곳. 귀족은 비과세였으나 시민은 과세를 지불해야 했다. 결국 주변 농촌지역과 비교하면 3배나 더 비싼 돈을 주고 마셔야 했다. 제대로 먹을 것도 없던 시절 와인까지 못 마시게 하니 이러한 봉기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결국 와인 관세는 1897년까지 이어졌고, 보르도의 와인 상인 역시 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그들도 와인에 과세가 매겨지는 것이 정말 싫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보르도 출신의 프랑스 대혁명 때 활약한 세력이 있으니 바로 지롱드파(La Gironde). 지롱댕으로 불렸던 이 파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담 롤랑. 남편이 혁명 정부의 내무장관이었으나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체포되어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바로 그때 그녀가 남긴 말.
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할 것인가!
O Liberté, que de crimes on commet en ton nom!
(Oh Liberty, what crimes are committed in thy name!)
지금의 지롱댕은 바로 황의조 선수가 활약하는 축구팀 이름 'FC 지롱댕 드 보르도(F.C. Girondins de Bordeaux)'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FC 지롱 FC 지롱댕 드 보르도 댕 드 보르도
결국, 지금의 보르도 와인을 만든 것은 영국에서의 소비, 네덜란드인의 간척 정신, 그리고 상인다운 마케팅 기법, 그리고 풍부한 프랑스의 재배환경이 더해서 만들어졌다는 것. 여기에 프랑스혁명까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 술을 통해 보는 다양한 사회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