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사우나
살 플레옐의 '플레옐'은 쇼팽이 사랑한(그리고 판매 수익 10%도 커미션으로 챙기던) 피아노 브랜드의 그 플레옐. 그러나 사실 쇼팽의 파리 고별 무대나 라벨의 '하바네라', 포레 피아노 3중주의 초연 등 19세기-20세기 초 클래식 음악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살플레옐은 현재의 공연장으로 확장 이전하기 전의 다른 곳이었다고 한다. (쇼팽의 숨결 사라짐)
나름 콘서트홀로 명성을 쌓은 뒤 1928년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번화가에 큰 규모로 새 건물을 지었으나 개관 9개월 만에 화재가 발생했단다. 또 하필 바로 다음 해에 세계 대공황(1929년)이 터져 이래저래 재건축을 쌈마이로 하느라 음향이 안 좋은 공연장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파리 필하모니가 개관하면서 한동안 살플레옐의 클래식 공연을 없애버렸고 파리 유일 콘서트홀로서의 상징적인 지위도 사라졌다고. 그래서 그렇게 클래식 공연이 없었구나..
살 플레옐에서 뭔가의 공연을 보고야 말 테다-하고 찾아봤을 때
날짜가 맞는 유일한 세 공연이
힙합
디스코
메탈
이었다.
이중엔 디스코가 낫지- 하고 이름도 모르던 뮤지션의 공연을 덥석 예약했는데 알고 보니 이름만 몰랐던 거장 뮤지션. 다이애나 로스의 I'm coming out과 Upside Down을 시작으로 다프트 펑크의 Get lucky를 창조한 나일 로저스였다.
표는 40유로 정도 주고 샀는데 저렴한 2층 날개 자리를 선택한 것이 오히려 신의 한 수였다. 여느 극장의 S석쯤 될, 스테이지 바로 앞의 자리는 (표 값도 비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략 800-1000명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떼거지로 갇혀 있었다. 문제는 파리의 에어컨 없음은 공연장에도 예외가 아니라 서로 다닥다닥 붙은 상태에서 연신 부채질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
반면 가장 싼 축에 속하는 날개 자리는 의자가 단 한 줄로 놓여 있고 옆으로 공연을 내려보는 위치라서 언제든 일어나 춤을 춰도 뒷사람에게 전혀 폐가 되지 않았다. 스테이지 앞과 달리 공간도 넉넉하고 중간에 다리 아프면 다시 앉을 수도 있고.
반짝이는 로고,
찰랑이는 반짝이 가운을 입은 가수들,
나일 로저스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 가발과 스타일리시한 반짝이 재킷..
다 너무 70년대 디스코스럽고 내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점차.. 스테이지 사람들이 서서히 더위에 죽어가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공연장은 뿌옇다.
파리도 밀라노 못잖게 덥던데 왜 에어컨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지 정말 궁금하다. 공연 후반에는 이 큰 공연장이 스팀 사우나장이 된 것 같았다. 마지막 노래는 관객을 스테이지로 불러올려 마치 클럽처럼 같이 떼로 춤을 추었는데, 나일 할아버지는 연세도 있으신 분이, 틀어 올릴 수도 없는 저 긴 가발에, 반짝이 재킷에, 고역이겠다 싶었다.
공연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는 데 사람들 목 뒤가 다 땀으로 흥건하다. 이건 뭐 찜질방 내려오는 계단도 아니고..
그래도 오래간만에 너무너무 즐거웠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 남 눈치 안 보고 실컷 춤도 추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공연장 구경하려고 아무 공연이나 찍었는데도 이런 행운이.. 역시 파리는 파리인가 보다. 밖으로 나오니 광선을 뿜는 에펠탑과 개선문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새삼 한번 더, 역시 파리는 파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