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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May 04. 2021

여행가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여행 가방을 보며 다음날 이른 아침 공항으로 나서야 하는 사실에 설렘과 한숨이 교차한다.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낯선 바람은 늘 좋다.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설렘이라는 상상은 시간차를 두고 찾아오는 행복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선명해진다. 상상하던 풍경 속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매력적인 일. 여행지로 떠나기  날은 설레는 마음이 가장 크게 부풀어 있을 시간이니.





꾸려야 할 짐이 많지 않은 여행에도 거실 한 복판 여행가방을 열어둔 채 며칠을 지낸다. 그것은 머물고 있는 장소 밖으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전적 행위임과 동시에 평소 여행의 설렘을 커다란 가방 속에 숨겨 두고 제어하며 살아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꽁꽁 숨겨 두었던 그 간지러운 마음은 가방을 펼치는 순간 거실 곳곳에 퍼져 일상의 시야가 흐려진다. 자연스레 펼쳐진 가방을 들고 떠나는 여정을 상상하는 농도는 점차 짙어진다. '겨울이니 눈이 올 수도 있겠지. 눈길을 걸을 수 있으니 양말을 하나 더 챙겨야겠다 아, 그러다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혹시 모르니 깨끗한 양말로 한 켤레 더 챙겨야겠다' 라는 우스운 상상 같은. 지난밤 거실에서 펼친 상상의 참혹한 결과물은 여행지 첫날 저녁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숙소에 도착한 후 여행가방을 뒤적이다 이걸 왜 챙겨 왔지 싶은 것이 간혹, 아니 사실 자주 있었다.


여행을 적게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적당한 짐을 꾸리는 일이란 여전히 쉽지 않다. 너무 많이 가져가면 무게와 부피로 고생할 것이고 적게 가져가면 또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낄 테니깐 말이다. 여행을 위한 짐의 종류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여행지의 낭만. 그 허무맹랑한 이유로 짐의 크기와 종류를 결정한다. 당신과 기나긴 여행을 상상하며 나는 가방 속에 무엇을 낭만이라 생각하며 챙겼을까.


잠깐의 생각에도 수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것들 중 가장 첫 줄에 있는 것은 계절. 파리에서 같이 보내는 일 년 동안 네 개의 계절을 하나씩 담은 시간. 그 풍경 위로 같이 보내 보고 싶은 마음이. 더군다나 그것의 처음은 파리 이었으면 한다. 단순히 내가 머무는 곳이 파리이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었다. 처음의 겨울 여행 이후로 몇 년이 흘러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파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겠지. 여러 계절 속에서 파리와 함께 머물 수 있다면 우리의 애틋한 마음들 또한 쉽게 변형되지 않을 거라 상상한다. 찬란한 풍경 속에 우리의 시간을 숨겨둘 수 있는 세상에 몇 되지 않는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는 도시. 네 개의 계절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가장 먼저 챙기고 싶다. 따뜻한 장갑과 목도리 그리고 얇은 가디건처럼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을 위해서.

많은 시간이 흐르고 조금은 구겨진 주름을 가진 서로의 손을 나란히 붙잡고 파리를 걸을 때 우리는 숨겨둔 오늘의 상상된 사랑을 추억하며 행복할 것이다.



네가 네 시에 온다고 하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 거야.


- 생택쥐페리, 어린 왕자 중


해가 길어진 저녁. 퐁네프에서 퐁데자르 방향으로 걸으며 놓여있는 부키스트의 선반을 올려보다 문득 들어온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그 속에서 머물고 있는 나의 시간은 세 시쯤이겠지, 그렇게 마음을 토닥이며 마음속 한 가운데 여행가방을 펼쳐 놓은 채 파리에서 지나가는 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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