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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남방 Apr 22. 2021

19구, 꼭대기 방


최유수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가 고르고 고른 단어들의 조화는 교묘하게 맞물려 감정의 미세한 틈을 묘사한다. 묘사된 문장들은 감기처럼 사람을 앓아봐야만 적힐 수 있는 것들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누군가의 마음으로 힘껏 달려가 치열히 부딪힌다. 까마득한 밤을 지나 마주한 새벽녘으로 채워진 거리와 마주할 때 느껴지는 것들을 활자로 기록한 책.


잠든 너 /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 중,


손가락빗으로 너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은 너의 마음을 애무하는 일이다 팔뚝과 어깨 사이로 널부러진 너와 나의 체온을 섞는 것은 마음을 포개어 감싸는 일이다

육체는, 육체의 사랑만을 하지 않는다




19구의 꼭대기 방.


몽마르뜨 방향으로 창이 나있고 막 동이 트는 아침의 햇살이 구석 벽면부터 가득 차오르는 자그마하지만 파리의 어느 높은 방.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기척에 흰색의 집주인은 자기와 비슷한 색의 침대 밑으로 숨어 기회를 조금씩 엿본다. 그 틈에 삶의 흔적이 쌓인 당신의 내밀함 속으로 조심스레 한 발자국 디뎌본다.


지새운 밤.

대로에서 들려오는 삶의 소리는 희고 둔턱한 벽에 부딪힌 후 나란히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으로 떨어진다. 숨어있던 집주인은 자신의 세상을 다시 찾은 뒤 이른 저녁 들어온 새로운 존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듯하였다. 책은 바닥 곳곳에 쌓여 있고 작은 부엌에 쌓인 접시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벽난로 위에 놓인 물건들은 당신의 하루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김 없이 상상하게 하였다. 쉽게 잠 못 드는 밤. 옅은 숨소리를 조심스레 귀 기울여 듣다 팔에 널브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어 본다. 식어가는 체온을 붙잡고자 다른 한 팔로 너를 더 가까이 끌어온다. 조금 더 밀착된 우리의 온기로 빈 사이 공간을 메운다. 수줍게 채워진 당신의 세상에 잠시나마 들어와 그렇게 뜬 눈으로 까마득한 밤 너머의 아침을 맞이한다.


텅 빈 새벽의 파리.

상처 받은 마음이 검은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군다. 바람 부는 대로 두었더니 멀리 날아가 어느새 파리 19구, 꼭대기 방 창문 아래에 턱 하니 걸렸다. 멀리서 돌아오라 외쳐보지만 나의 것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그 마음이 이제 오로지 나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소환장을 적기 위해 종이를 꺼낸다. 그 위로 지난밤 못다 한 말을 나열한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니 종이 위에 남은 말은 고작 사랑, 하나의 마음이었다. 커피 열매를 건조하고, 볶고, 갈아 뜨거운 물에 부어 걸러내면 커피가 남 듯 너에게 편지를 쓰는 과정도 동일하다. 메마른 마음이 열병에 그슬려 짙어진다. 그것을 종이 위로 쏟은 후 손 끝으로 거르고 걸러보니 남는 건 나와 닮은 그리움이었다.


심장과 마음은 동일한 층위에 존재하지만 엄연히 다른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지만 나의 경우 심장으로부터 약 반 뼘 아래. 그곳에 마음을 위한 방이 하나 있다. 나란히 누워 포개 질 때. 너의 널브러진 머리카락은 그 마음이 위치한  피부의 외곽에 닿인다. 어깨를 베고 있다 어느새 마음을 베고 있다. 마음을 베고 곤히 잠든 당신이 품 안에 있다. 나의 심장은 너를 향한 나의 것이 아닌 마음의 고백을 숨기기 위해 더욱 강하게 요동쳤다. 높은 방에서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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