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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Feb 07. 2021

입사 열 달, 밤 11시 1의 시작

2막의 시작을 울리는 빨간 원

 새 팀장이 왔다. 물개 팀장이 해고되고 다섯 달, 사수가 그만두고 두 달이 지난 참이었다. 키가 작은 중년 남자였다.


 짧고 빽빽한 머리. 작은 눈 위에 얹힌 뿔테 안경. 의상은 항상 짙은 남방에 짙은 청바지나 슬랙스였다. 어울리지 않게 닥터마틴을 좋아하는, 언제나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 여기저기 염탐하듯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를 이제부터 두더지 팀장이라고 부르겠다.   


 그렇다.

 그가 바로 제2막의 핵심 인물이다.



두더지 팀장과의 첫 만남


 사수가 회사를 나간 뒤 나는 한 달가량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 일이 즐거웠다. 회사도 더 이상 지옥 같은 공간이 아니었다. 고작 몇 달 전 일이 꿈처럼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지독히도 괴로웠던 시간은 물론 흉터를 남겼으나, 이제는 만져도 쓰라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난데없는 대표의 부름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새로운 팀장을 뽑았으니 함께 일해 보라는 제안을 던졌다. 지긋이 나이 든 사람인 데다 경력도 짱짱하니 배울 게 많을 거라고 했다.


 대표는 사수와 내 나이 차이가 7살밖에 안 나는 게 문제의 요점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대표가 눈을 반짝이며 어떠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사업 확장을 위한 필요로 뽑아 놓고는 마치 나를 위한 배려인 양 생색을 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대표가 물은 건 내 의사 따위가 아닌 데다 이미 쩐내가 가득한 방 안에서 그가 다시금 담배를 꺼내 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빨리 연기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원하는 반응을ㅡ그러나 최대한 소극적으로ㅡ보였다.


 항상 그렇듯 별 소득 없는 충고를 늘어놓으며 어른 행세를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대표는 입을 다셨지만, 나는 ‘냄새가 심하네요’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문을 닫고 나오며 나는 대표와는 달리 새 팀장의 지긋한 나이가 조금 걱정되었다. 사회생활하며 쌓여 온 중년 남자에 대한 인상이란 대체로 그리 아름답지 못한 탓이었다.


 윗사람 지시에는 무조건 ‘예스’하곤 아랫사람에게 무수한 일 거리를 보따리로 선물하는 이들.
 회식 자리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 2차를 외쳐대며 여직원들에게 눈치를 주는 이들.
 오전 늦게 출근해선 점심-낮잠-담배-돌아다니며 직원들 간섭-무한 담배 루트를 끝낸 뒤 4시쯤에야 자리에 앉아 퇴근 10분 전 피드백을 주는 이들.
 지독한 회식 러버에 남이 따라주지 않으면 혼자 술잔도 채우지 못하는 팔 짧은 이들.
 비위가 상해 구구절절 쓰기도 역겨운 이들까지.


 중년 남성 모두가 저 꼴은 아니었지만, 직장 생활을 1년이라도 경험해본 이들은 다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저런 이들 밑에서 여러 가지를 감내하면서도 맡은 바를 해내는 영웅들이었다.




 새로 온, 그러니까 이제부터 두더지 팀장이라고 부르기로 한 그는 그런 의미에서 최악은 아니었다. 술 좋아하고 회식 자리를 즐기는 사람치곤 선방인 편이었다. ‘요즘은 또 젊은 사람들 눈치 보느라고’ 라며 쓸데없는 인트로를 붙이긴 했으나, 어쨌든 회식 참석을 강요하거나 야근 눈치를 주진 않았다.


 이런 걸 선방이라고 써야 한다니 아, 갈 길이 멀다.


 어쨌든 사수의 퇴사 이후 자유시간 동안 나는 원래의 나, 즉 진짜 나다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할 일을 끝내고 6시 정시 퇴근(칼퇴 아니고 정퇴!)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회식 자리에서 꽃살과 육사시미만 골라 날롬 주워 먹곤 8시에 가뿐히 자리를 뜰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새벽나무라고 합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열심히 배우고 따라가겠습니다.”

“원래 하던 분야가 이쪽이구나. 이건 꽤 했네. 잔뼈가 굵겠다. 내가 더 배워야겠는 걸.”


 두더지 팀장과 프로젝트 착수를 위해 처음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던 날, 그는 칼 같은 내 성격을 단숨에 눈치챈 것 같았다. 일 얘기에 들어가기 앞서 이전 경력을 보곤 칭찬부터 건넸다. 그는 한 필드에서 20년을 구른 전문가치고 겸손한 편이기도 했다. 일할 땐 거침없다가도 개인적으로 고객이나 팀원을 대할 땐 꽤 신중했다. 그러고 보면 사회생활 짬이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팀장을 대하는 팀원들의 자세


 나는 두더지 팀장이 들어온 뒤 두 달 동안 그와 2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며 숨 가쁜 연말을 보냈다. 바쁜 건 모든 팀원이 마찬가지였다. 상반기 성과가 부진한 만큼 다들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고군분투였다. 입사 두 달 차의 두더지 팀장은 지난 열 달 간의 팀 실적을 본인의 실책인 양 여겼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다.


 K와 올빼미는 그런 두더지 팀장에게 충성을 외쳤다. 그들은 이전 물개 팀장이 한창 태업하던 때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불만을 늘어놓던 사람들이었다. 40대 초반 동갑내기인 K와 올빼미는 커리어 상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팀장 하나 잘못 만나서 고생이라는 레퍼토리를 가장 즐겨했다.


 같은 시기 자신들보다 열 살 어린 30대 초반의 내가 사수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든 뭘 하든 그들의 알 바 아니었다.

 뭐 원래 인간은 자신의 불행이 가장 큰 법이라고 하니까.


 재미있게도 그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능력 있는’ 팀장이 왔는데도 술자리에서의 한탄을 그치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는 한탄이 일종의 시기와 질투로 변질된 채였다. 앞에서 충성을 외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특히 대표를 잘 따르던 K는 두더지 팀장이 온 이후로 대표의 애정과 무한한 신뢰가 편향되는 탓에 자신이ㅡ말그대로 ‘아오안’이 된 게 꽤 서글픈 모양이었다.


 나는 야근을 하다 울린 올빼미의 전화로 그들의 술자리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들은 이미 한껏 불콰해진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새 팀장하고 일하니 어때? 좋아? 일 잘해?”

“제가 뭐라고 평가를 하겠어요. 그래도 확실히 배울 점이 많아요.”


 K는 내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앉은자리에서 갑자기 고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주 잘났네. 잘났어. 들어오자마자 팀장 자리도 꿰차고! 대표도 좋아 죽고!”


 그는 두더지 팀장의 이름 세 자를 외쳐가며 잘났다며, 좋겠다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이름 세 자를 어찌나 또박또박 스타카토로 외치는지 잘못 들으면 응원 같기도 했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싸들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참 지겹게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두더지 팀장이 들어오기 몇 달 전 입사한 또래 직원 W는 K와 올빼미와는 또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의 시기 대상은 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수랑 일하는 나를 부러워하다가 괴롭힘 당하는 꼴을 보곤 바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번에는 새로 온 팀장과 함께 일하는 내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W는 K와 올빼미를 싫어했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배울 게 별로 없다고 투덜거렸다.

 K와 올빼미가 물개 팀장에 대해 하던 한탄과 소름 끼치도록 같은 대사였다.




밤 11시 난데없는 빨간 원


 그렇게 두 달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들 부진했던 상반기 대비 자랑할 만한 성과를 낸 하반기의 자신들을 뿌듯해했다. 그럴 만했다. 팀 내에서 서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우리 모두는 다른 팀에게서 쏟아지는 무시에 대한 설움은 같이 짊어진 동지였다. 그래서인지 종무식 자리에선 부러 다른 팀들 보라고 다들 목소리를 높이고 하하호호 손뼉 치며 (거짓) 친목을 자랑하기도 했다.  


 대표도 그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의 바이브에 올라탔다. 한 해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고생한 팀을 칭찬하고 치켜세웠다. 내게 발생한 직장 내 괴롭힘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새로 부임한 두더지 팀장을 향한 애정의 메시지는 빼먹지 않았다. 다른 팀장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두더지 팀장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엔 부러움과 시기심 중간 어딘가인 감정들이 섞였다. 직원들의 박수소리에 두더지 팀장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봤자 두더지 팀장이 한껏 고양된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대표 맞은편에서 종무식 뒤풀이를 시작한 그는 거듭 술잔을 꺾다가 결국 일찌감치 취했다. 자리가 불편했는지 안주도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부러 팀과 멀찍이 떨어져 다른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내 근처로 자릴 옮겼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니 이미 팀원들이 모여 내 안전지대를 점령한 뒤였다. 나는 곧 자리를 뜰 심산으로 잠시 그들과 대화를 섞었다.


 거의 인생 최고의 날인 마냥 두더지 팀장은 누구도 요청하지 않은 거창한 연설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그중 반이 내 칭찬이었다. 그가 입사한 후로 두 달간 두 개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으니 팀원 중에 칭찬할 사람이 나뿐인 탓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올빼미와 K, 그리고 W의 표정은 점차 굳어갔다. 나는 그의 기나긴 연설이 끝나자마자 팀원들과 다 같이 자축하는 건배를 하곤 얼른 짐을 챙겨 자리를 벗어났다.  


 인조적으로 밝고 시끄러운 공간을 벗어나자 어둡고 차가운 그러나 고요한 밤거리가 나를 반겼다.

 나는 코트를 여미며 지하철 역까지 길을 걸었다. 문득 지나온 일 년의 풍경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감개무량한 기분에 취했다.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낸 내가 자랑스러웠다. 결국 스스로를 잘 보살핀 덕에 다가온 시련을 이기고 벗어났다.


 내년에는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사수는 떠났고, 능력 있는 팀장이 왔으니 일도 제대로 배우며 성장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입가에는 실실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 그 빨간 원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씻고 나와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알람을 맞추려고 핸드폰을 든 순간 노란 배경의 어플 위로 뜬 빨간 원을 발견했다. 열몇 개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친구들 단체 대화방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열었더니 웬걸 맨 위에 놓인 건 두더지 팀장의 이름이었다. 순간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어 놀란 마음으로 대화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타 투성이인 짧은 말풍선들이 세로로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술도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헛 게 보이는 듯했다.


 ‘왜 먼저 갔어’
 ‘K도 싫고 올빼미도 싫어’
 ‘W가 너 질투한다. 내 앞에서 왜 너만 이뻐하냐고 하네.’
 ‘보고 싶어’
 ‘내가 너에게 중독된 건가?’


 나는 얼마 마시지 않은 술이 안주와 엉켜 구역질이 되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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