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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Jan 31. 2021

입사 여덟 달, 미세먼지 걷힌 가을 하늘과 같이

1막의 끝, Intermission

 여름 한가운데서 나는 사수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그의 본모습을 여과 없이 목격했다.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고 있는 어린아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못한 채 손에 잡히는 온갖 것들을 집어던지는 겁쟁이. 그게 자신을 보호하는 거라고 믿는 어리석은 자.


 나는 사수에게 대놓고 ‘나에게 그딴 식으로 굴지 말라’고 경고하듯 말했다. 몇 달 전 그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확연히 달라진 내 모습에 화내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놀란 듯했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낯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손쉽게 나를 놓아주었다. 

 허무할 정도였다. 



타임 오버 


 매번 회의실에 불러 앉혀 놓고 윽박을 질러가며 진행했던 업무 회의는 이제 메일과 메신저로 대신했다. 가끔 마주 보고 회의할 때에도 필요한 내용만 주고받은 뒤 빠르게 대화를 끝냈다. 프로젝트 종료까지는 아직 한 달이 더 남아있었다. 이제는 그가 나보다 더 안달이 나 보였다. 얼른 끝나길 바라듯 초조해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공식적 조치는 없었지만, 대표는 사수에게 경위서를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사수는 그걸 감지덕지로 여기는 대신 부당한 처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내게는 틈만 나면 배신자를 대하듯 적대감을 드러냈으며, 대표와 팀원들 앞에서는 억울하고 불쌍한 모양새를 했다. 


 실제로 그 불쌍한 척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대표는 나를 불러 너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뜬금없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나는 가만 듣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럼 욕을 들어먹고 각티슈에 맞아도 된다는 말씀이시냐’고 물었다. 대표는 황급히 입을 다문 뒤 제 사무실에서 나를 내보냈다. 


 아, 진절머리가 다 났다. 




 나는 이제 사수가 하는 행동이 전부 우습기만 했다. 대표나 팀원들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친목질을 하는 그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더 이상 그의  앞에서 떨거나 위축될 것도 없었다. 특히나 일에 있어선 더더욱. 나는 내 몫을 넘어 그의 뒤치다꺼리까지 하고 있는 참이었다. 쫄려도 사수가 쫄려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객사와의 미팅 중에 그는 말을 절며 땀을 함빡 흘리곤 했다.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해 설명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옆에서 그에게 따로 메모를 적어 전달하거나 조용히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곤 했다. 그는 그게 일종의 화해의 제스처라고 생각했는지 일정이 끝난 뒤 나를 툭 치곤 말했다. 


 "아 힘드네. 맥주 한 잔 하고 갈까요? 근처에 맛있는 집 있는데."


 저하고 풀 회포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사수의 눈에 또다시 당혹감과 함께 분노가 비쳤다. 알 게 뭐람. 


 나는 등을 돌려 내 길을 갔다. 




스스로 파는 구덩이


 사수는 그 이후로 더욱 급격하게 사무실 나오는 횟수를 줄여 나갔다. 여전히 똑같은 핑계였다. 신사업 시장조사 겸 영업을 위한 외부 전문가 미팅이라나 뭐라나. 문제는 회사에서 그가 처한 위치가 급격히 하락했다는 데에 있었다. 어쨌든 직장 내 괴롭힘 건으로 그는 대표에게 요주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매번 두꺼워지는 지출결의서 역시 그런 대표의 신경 긁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결국 대표는 사수를 제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한 마디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대표가 몇 마디 내뱉자 사수는 결국 분노 조절을 못하고 뻥, 터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기껏 치장해놓은 가면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당황한 대표는 '내 앞에서도 이딴 식으로 굴 거냐'며 소릴 질렀고, 사수는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내리치며 반성의 퍼포먼스를 펼쳤다고 한다.


 내가 이 깜찍한 둘만의 에피소드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사수가 술에 취해 제 입으로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주체가 안 되는 분노가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술에 취한 그가 전화를 걸어 섭섭하다는 둥, 배신이라는 둥하는 헛소리를 즐겁게 들었다. 


 결국 대표에게까지 본모습을 들킨 사수는 발 빠르게 도망갈 채비를 했다. 이제는 핑계도 대지 않고 사무실에 늦게 출근하거나 도중에 몇 시간씩 자리를 비웠다. 그는 매번 정장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누가 봐도 열심히 면접 보러 다니고 있소, 하는 꼴이었다. 


 결국 어느 운 나쁜 회사가 그를 떠맡게 된 모양이었다. 


 사수는 프로젝트가 종료되는 9월의 끝을 퇴사일로 잡았다. 그게 유일하게 남아있던 그의 책임감 같았다. 자신이 손을 댄 나머지 프로젝트나 신사업은 결국 없던 일이 되거나 K에게 얼렁뚱땅 넘겨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등을 돌린 그 순간부터, 그리고 대표 앞에서 스탠딩 쇼를 선보인 그 날부터 팀과 회사 전체에 잔뜩 삐쳐 누구에게도 말을 주거나 받지 않았다. 


 어차피 퇴사 선고도 했겠다, 사수는 한껏 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프로젝트 업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사무실 홀로 남아 낑낑대며 보고서를 채우고 있었다. 늦여름의 밤이었다. 땀이 나다가 금세 식었다. 일은 버거웠지만, 몸은 힘들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해방감이 클 가을이 오고 있었다.  




끝. 끝. 끝.


 프로젝트 최종 보고회 날이었다. 나는 사수와 고객사 앞에서 만났다.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만 들렀다 가는 그였기에 몇 주만에 보는 거였다. 그는 형편없는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눈 밑이 퀭하고 머리도 덥수룩했다. 누가 봐도 여유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자신이 손 놓은 지 오래인 보고서를 들고 발표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 애처로우면서도 꼴 사나운 모습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발표가 끝나고 사수와 나는 고객사 앞에서 각자 갈 길을 앞에 두고 나란히 섰다. 그는 아무도 없는 시간에 짐 정리를 하러 사무실에 들를 참이라고 했다. 이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좋겠다고 말하며 또 사과를 덧붙였다.


 “그동안 너무 미안했습니다. 진심이에요. 앞으로 다 잘 되길 바랄게요.”


 사수의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왜인지 후련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는 얼핏 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감사했다는 말로 인사를 마치고 그에게 등을 지고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 올라갔다. 해가 저물며 하늘엔 노을이 졌고,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불었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방울방울 눈물이 났다. 언덕을 오르며 나는 결국 엉엉 울고야 말았다. 그 지옥 같던 봄, 매일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 떠올랐다. 


 결국엔 다 끝이 날 거야. 조금만 참자. 조금만 버티자.
다 끝날 거야. 끝이 있을 거야. 

 그 바람처럼 결국, 끝이 났다.

 나는 숨통을 옥죄는 목줄을 끊어 내고 내 발로 지하동굴을 빠져나왔다. 


 나를 집어삼켰던 보잘것없는 그림자를 쫓아내었다. 




새로운 나, 새로운 시작


 입사한 지 여덟 달. 10월은 일 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기도 했다. 나는 첫 출근하는 기분으로 회사에 갔다. 사수의 자리는 마치 누가 있기나 했었냐는 듯 어떤 흔적도 없이 비워져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턱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이제 다시 시작이구나.


 그 이후로 며칠은 인생에 몇 없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나는 마치 몇 달간 계속되던 미세먼지가 걷힌 가을 하늘처럼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어려웠던 문제들도 술술 답이 나왔다. 혼란스럽고 흐리멍덩했던 머릿속이 깔끔히 정리되어 갔다.   


 사수와 치고받기를 몇 달, 팀에도 이런저런 변화가 생겼다. 하릴없이 사무실 한편을 차지한 채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던 물개 팀장은 결국 해고되었고, 두 명의 또래 직원이 들어왔다. 나는 당분간 혼자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되었다. 사수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나는 팀원들과 일 하는 방식이나 가치관 면에서 잘 맞지 않았다. 


 그들과 나는 서로 다른 종목을 경기하는 사람들 같았다. 동그란 공을 두고 그들은 발로 찰 준비를 하고, 나는 라켓을 들고 칠 준비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의 키보드엔 ctrl, c, v 버튼만 유독 닳아 있었다. 뭐든 빨리, 많이 하는 게 최선이라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그들과 나는 서로가 잘못됐다고 대놓고 헐뜯거나 물건을 집어던져 주고받진 않았다. 세상엔 그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거였다.


 팀원들과도 분리되니 일이 한껏 즐거웠다. 몇 달간 홀로 투쟁하듯 읽어나간 책들이, 홀로 하던 공부가 그런 나를 밀어 올리며 도움을 주었다. 발목에 달아 놓았던 모래주머니를 털어 내고 가벼워진 몸으로 달려 나갔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었구나. 




 재미있게도 새로운 나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찾아왔다. 방금 막 거대한 보스몹을 잡고 올라왔는데 또다시 파이널 스테이지였다. 나를 위한 급격한 레벨업 단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1막의 끝, 

 짧은 인터미션 후

 2막의 커튼이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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