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나무 Feb 14. 2021

입사 일 년, 오지 말았어야 하는 메시지

그들은 영영 알 수 없는 것

보고 싶어
내가 너에게 중독된 건가?


 그 날. 그러니까 팀원이 모두 모여 지난 성과를 축하하고 수고를 치하하는 날. 마침내 헌 해를 털어내고 다가올 새해를 고대하는 그 날. 

 나를 찾아온 건 새해를 향한 격언 대신 헐고 헐어버린 중년 남자의 더러운 메시지였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대화창을 닫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외면했다. 자고 일어나면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일찍 잠자리에 들길 무색하게 잠을 설쳤다. 다음날 두더지 팀장은 술김에 한 실수라며 미소 띤 이모티콘(‘^^’)과 함께 아침 인사 메시지를 보냈다. 여전히 휴일이었고 그마저도 사과 같지 않은 사과였지만, 나는 그 역시 민망하겠거니 싶어 괜찮다는 짧은 메시지로 답했다. 


 그래, 실수겠지. 그냥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았던 탓이겠지. 

 다른 팀원보다 조금 더 친밀하다는 이유로. 그래. 그래서 그랬겠지.   


 는 개뿔.




그런 착각을 했다


 두더지 팀장은 괜찮다는 내 말을 ‘한 번 봐줄 테니 다신 실수하지 마쇼’ 대신 ‘그 정도쯤이야 편할 대로 하세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아주 자연스럽게 업무시간을 넘나들며 온갖 메시지를 보냈다. 외근 미팅을 나가선 고객이 맘에 안 든다는 둥 툴툴대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퇴근 이후에는 묻지도 않은 본인의 저녁 일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급히 처리할 업무 때문에 주말에 연락이 오는 경우는 되려 안심이 되는 정도였다. 


 그는 회식 좋아하는 사람답게 자주 저녁식사를 빙자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K와 올빼미, W 역시 술이라곤 사족을 못쓰는 자들이었다. 그런 면에선 훌륭한 팀워크였다. 팀원들은 일을 미루거나 대충 할 핑계로 두더지 팀장을 술자리로 꾀여내기도 했다. 그들의 속내가 번번이 읽히는 내겐 피곤하기만 한 자리였다. 나는 자연스레 회식 자리를 피해 다녔다. 


 그렇지만 그가 보내는 취중 메시지까지 피할 순 없었다.


왜 안 왔어
네가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


 밤늦은 시간 핸드폰 액정이 번쩍하는 순간마다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오타와 주정 섞인 메시지를 보며 나 역시 뱉어내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무시가 최선이라고 여겼다. 선택지도 별로 없었다. 쌍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무응답에도 그는 어김없이 다음날 ^^와 함께 짧은 사과 메시지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그가 민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둔, 아들 둘 딸린 중년의 유부남이었다. 본인보다 거진 스무 살 어린 직원에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런 추태를 보이니까 얼마나 창피하겠어. 


 그런 착각을 했다.


 겨우 그 착각에서 벗어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나는 그제야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실 그들은 창피함이라고는, 민망함이라고는, 부끄러움이라는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걸.




날짜 감각도, 시간 감각도


 작년 한 해 동안 고생한 나를 위해 5일의 휴가를 냈다. 더 바빠지기 전에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래 못 보았던 친구도 만나고,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 참이었다. 휴가신청서에 결재를 받으러 두더지 팀장에게 갔더니 그가 대뜸 물었다. 


"5일씩이나 뭐하려고?" 

"그냥 혼자 여행이나 다녀오려고요."


쓰읍, 여자가 위험하게. 안 돼.

 나는 그저 허허 웃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개소리인지, 그게 왜 개소리인지 굳이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하나 친절히 지적해준다한들 쉽게 알아들을 양반도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휴가 동안에도 어김없이 그의 메시지는 그치지 않았다.


뭐 해^^? 잘 쉬고 있어?
새벽나무 없으니까 사무실이 너무 휑하다
얼른 돌아와


 나는 대충 대꾸하며 빠르게 대화를 종료했다. 대화목록 맨 위에 있는 두더지 팀장의 이름이 꼴 보기 싫어 가족과 친구 대화방을 위로 고정시켜두고 여기저기 메시지를 뿌렸다. 그 이름이 아래로. 아래로 사라지도록.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아무렇지 않아야 했으니 가장 친한 친구에게 회사나 두더지 팀장 얘길 할 때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나는 외면하는 중이었다. 이 상황도, 감정도 그냥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 더러운 메시지를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애써 외면했던 불쾌함이 실체가 되어 나를 진흙 구덩이로 잡아 끌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아. 별 거 아니야. 그냥 무시하면 돼. 무시하고 일만 하자. 일에만 집중하자. 


 나는 순간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계속 무시하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두더지 팀장도 곧 그만둘 거라고. 그냥, 그러면 된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바람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발 


 1월에는 한 달만에  프로젝트를 2개 수주해냈다. 운 좋게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팀의 첫 타자가 되었다. 2개 모두 두더지 팀장과 제안서 작업을 했다. 그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다른 팀원 대신 나와 일하고 싶어 했다. 종무식 때 진탕 술을 먹고 그의 앞에서 질투와 시기의 퍼포먼스를 보인 팀원들은 당연히 그런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다. 


 나 역시 선을 넘는 두더지 팀장이 불편했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부러 W나 올빼미 칭찬을 하며 함께 일해보시라 권했다. 나도 다음 프로젝트는 K와 해보겠다고. 그게 좋겠다고.


 몇 달 전 사수에게 그토록 괴롭힘을 당하는 와중에도 고려해본 적 없던 차악이었다. 나는 각티슈에 맞고 욕을 먹던 순간보다 중년 남자의 시도 때도 없는 메시지가 더 괴로웠다. 징그러웠다.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도 안나는 괴롭힘이었다. 심지어 가해자는 본인이 하는 짓거리가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나를 좋아했다. 

 자신과 내가 다른 팀원들과 달리 뭔가 통하는 데가 있는 특별한 사이라고 여겼다. 


 결국 두더지 팀장은 새로 수주한 프로젝트 중 하나에 자신과 나를 배정했다. 나머지 프로젝트에는 K와 W를 넣었다. 그는 프로젝트 추진 계획과 수행 멤버를 결정하는 일요일 밤에 굳이 내게 양해의 메시지까지 보냈다.


새벽나무가 요청했던 대로는 안될 것 같아. 미안. 이번엔 이걸로 봐주라^^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뇨, 팀장님이야말로 아니, 아저씨야말로 저 좀 봐주세요.


 저 좀 놔주세요. 제발.




내가 남자였다면


 두더지 팀장은 새 프로젝트로 외근을 다니는 동안 틈만 나면 일정에 저녁식사를 껴넣었다. 다른 업무 때문에 지방 출장이 생겨도 어떻게든 나를 데려가기 위해 괜한 핑계를 댔다. 나는 세 번에 한 번꼴로 그의 요청(이자 억지)을 들어주어야 했다. 어쨌든 업무인데 무작정 거절하거나 피할 순 없었다.


 그나마 일 때문인 건 나은 편이었다. 차 안에서 보내는 몇 시간 동안 그냥 업무 얘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고객이 했던 말을 복기하며 앞으로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고객과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방식이 좋을지 갖가지 질문거리를 연구해 그에게 던졌다. 그럴 때면 두더지 팀장도 대답하기 바빠 딱히 번잡스러운 말이 없었다. 


 문제는 업무가 끝난 시간이었다. 외근이 있는 날이면 두더지 팀장은 꼭 근처에 맛집이 있다며 저녁을 먹고 가자 했다. 나는 밥이고 뭐고 얼른 그의 차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거절도 한두 번이었다. 


 내가 불편한 티를 내며 피하는 날이 많아지면 그는 중요한 얘기라도 할 모양새로 팀 회식 자리를 만들어 나를 붙잡아두곤 했다. 당연히 중요한 얘기 따위 없었다. 그는 괜히 팀원들에게 잔소릴 해댔다. 내게도 업무 얘길 핑계로 충고하는 척 본인 삐진 티를 냈다. 


 나는 점점 그가 끔찍해져 갔다.  


 대화목록에서 그의 이름이 아래로 가라앉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업무 시간이건 업무 외 시간이건, 휴일이나 밤늦은 시간에도, 술에 취했든 멀쩡한 상태든 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몽유병 환자마냥 무의식처럼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그의 구구절절한 메시지가 허무할 정도로 짧은 답장으로 대꾸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그가 지쳐 그만두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메시지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두더지 팀장은 나의 짧은 대꾸도 ‘대답’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내 반응 같은 건 어떻든 상관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성적으로 도를 넘은 메시지를 보내는 건 또 아니었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성희롱이라고 할 수 있을지 판단을 내리기도 애매할 정도였다. 그가 보낸 메시지는 대부분 ‘보고 싶다’ ‘왜 (회식자리에) 안 오느냐’ 아님 ‘왜 먼저 가느냐’ ‘네가 없어서 심심하다’ ‘다른 애들은 싫다’라는 식이었다. 




 결국 먼저 지친 건 나였다. 몇 달간 계속되는 두더지 팀장의 메시지에 어느 순간부터는 휴대폰 액정만 켜져도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참다못해 주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캡처해 보여주며 상황을 털어놓았다. 친구들과 여자 동료들의 경악하는 표정과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유난스러운 게 아니었구나. 이 더럽고 끔찍했던 감정이 틀린 게 아니었구나. 


 재미있게도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명확히 인식하게 해 준 건 남자 동료의 뚱한 반응이었다. 


그냥 예쁘고 말 잘 들으니까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야 팀장이 이렇게 밀어주는데 배부른 소리냐?”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남자였다면,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오지 않을 메시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을 거라는 걸.

이전 09화 입사 열 달, 밤 11시 1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