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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Mar 21. 2021

퇴사 한 달 전, 인내와 침묵에 돌아오는 것

퇴사 선언

결국 퇴사구나.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한 해답을 찾았는데 왜인지 후련하지 않았다. 조금 착잡한 기분까지 들었다. 회사 안팎에서는 모두들 잘 생각했다고, 그동안 버틴 게 대단한 거라며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한가득 보내주었는데도 나는 쉽게 웃을 수 없었다. 


억울했다.  

내가 그동안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답안들이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사수의 달콤한 제안에 속아 사무실에 발을 들였던 날로부터 두 해를 채워가고 있었다. 사수에게 날아온 각티슈가 명중한 순간부터 두더지 팀장의 성희롱 메시지가 끊기기까지 1년 반이 걸렸다. 그러고도 반년을 더. 결국 대표에게까지 도달해서야 깨달았다. 


우물 안에서 고인 물은 정화될 수조차 없다는 걸. 


나는 우물을 깨부술 수 없었다. 

남은 건 그저 탈출뿐이었다. 




남들만큼이나 나도 나를


여름의 번아웃을 앓고 났더니 몸에서는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미뤄뒀던 여름휴가 대신 며칠 연차를 낸 김에 겸사겸사 병원을 찾았다. 초음파 검사 결과를 살피던 의사는 조금 이상한 게 눈에 띈다며 다음 달에 다시 보자고 했다. 그리고 다음 달의 나는 또다시 가을의 번아웃 속에 살았다. 이상증세도 잠깐이었고 딱히 아픈 데도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의사의 말은 겨울이 되어서야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퇴사를 결정하고 난 뒤였다. 바쁘니까 넌 빠져 있어, 하며 구석에 처박아둔 메시지를 몸이 찾아내서 머리로 향해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이제 정신 차린 거니? 그럼 이것부터 해결해,라고.


수술해야겠네요.


의사는 다시 한번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체 없이 결론을 내렸다. 큰 수술은 아니라고 했다. 시술에 가까운 정도라고. 현대인이라면 다들 한 번씩 겪는 일이라고도 했다. 모든 병원의 의사가 공통적으로 내리는 진단ㅡ스트레스 때문이란 말과 함께.


덤덤한 그의 말에 나도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수술 날짜를 잡고 며칠 쉬어야겠구나, 차라리 잘 되었다, 하면서. 소식을 들은 친구와 지인들은 올 게 왔다는 반응이었다. 


“회사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몸이 성한 게 더 이상하지.”

“너니까 그 정도로 끝나는 거야. 나였으면 진작에 쓰러졌을 걸.”


그리고 이미 번아웃-수술대 사이클을 한 번 이상 돌아본 경험자들은 섬뜩한 조언까지 덧붙였다.


“원래 진짜 바쁠 때는 안 아프다가 한숨 놓으면 병이 몰려온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 돼.”


그러고 보니 참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차라리 몸이라도 아파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는 쌩쌩하다가 이제 좀 쉬어볼까 하면 지금이구나 이 놈! 하면서 몸도 파업을 하고 마는 것이다. 아니 왜 바쁘지도 않은데 아프고 난리인데, 그동안 꿋꿋하게 버텨온 몸에게 못된 말까지 해가며. 


그동안 내가 남들만큼이나 아니, 남들보다도 더 

나에게 못할 짓 했다는 건 알지도 못하고. 




새로운 소식


연말이기도 하니 남은 연차를 소진하며 수술도 하고 회복도 할 계획이었다. 때마침 대표는 서비스 오픈을 코앞에 두고 프로젝트를 갈아엎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뽐내며 기어코 기획부터 모든 것을 리셋했다. 신사업 TFT를 모아 프레젠테이션 하던 그는 간만에 즐거운 모습이었다. 그랬다. 대표에게 신사업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투명한 유리벽에 신명나게 로직트리를 그려가며 놀 구실이 필요했을 뿐. 


TFT 멤버들은 6개월 간의 프로젝트 기간 동안 그런 대표의 모습에 차차 적응해 갔다. 덕분에 이제는 누구도 당황하지 않고 엎어진 밥상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나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나로선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새로운 방향의 기획을 스케치해가며 인수인계하기에도 좋은 시점이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야. 넌 죽었다고 보면 돼.

회의가 끝나고 나만 남겨둔 채 대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선포했다. 나는 대충 대꾸하고 그보다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 


“저 마지막 주에는 며칠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이 와중에?”

“연말에 연차 소진도 해야 하고요. 수술이 있어서요.”

“그래? 심각한 수술이야?”


대표는 짐짓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아니고요.”

“그럼 언제 다시 일할 수 있는데?”


혹여나 일에 지장이라도 생길까 봐 하는 걱정.


“그냥 마지막 주만 쉬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알았다. 쉬면서 정신도 좀 차리고 와라.”


대표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적합할 법한 말로 내게 위안을 주고 자리를 떴다.   




연말 휴가는 의도치 않게 길어졌다. 옆 회사에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와 며칠 새 감염자까지 꽤 늘어난 모양이었다. 회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필수 인력을 제외하곤 전부 재택근무로 돌렸다. 직원들이 집에서 편하게 일하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던 대표도 당장 코앞까지 다가온 재난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1월의 몇 주를 집에 머물며 충분한 회복을 할 수 있었다. 대표나 TFT와는 줌으로 미팅을 진행했다. 아, 훌륭한 언택트 시대여.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쾌적한 업무 환경이라니. 이제는 회의가 끝나고 나머지 공부하듯 그의 담배연기 복습할 일도 없었다. 야-호.


그렇게 짧게나마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통근시간이 세이브되니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하고 오후에는 조금의 여유도 즐길 수 있었다. 요가를 하려던 참에 친하게 지내는 다른 팀 동기가 불쑥 메시지를 보내왔다. 몸은 좀 괜찮냐며 안부인사부터 건넨 동기는 곧이어 조금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팀 연간계획 발표하면서 회의를 했는데 좀 이상한 말을 들어서


동기가 속한 팀의 팀장인 Z는 발표 말미에 불쑥 내 이름을 꺼내며, 올해부터 내가 그 팀에 합류해 함께 일하게 됐다는 얘길 전했다고 했다. 


나는 새벽나무한테 들은 게 없으니까 궁금해가지고. 대표님이랑 얘기된 거야?


나는 노트북 화면 위로 늘어나는 말풍선을 바라보면서 그만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그럴 리가.

나도 몰랐던 나의 새로운 소식인 걸.




우물 안의 혈투


사실 그 뒤로 덧붙여진 얘기가 더 흥미진진했다. 2년을 통틀어 나와 1시간 이상 말 섞은 적 없는 Z 팀장은 나의 발령 소식 말고도 인성과 태도에 대한 자신의 의견까지 꼼꼼히 덧붙였다고 했다.


“사실 너무 받아주기 싫었는데 대표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거 알죠. 새벽나무 그렇게 팀 자꾸 옮기는 거 워낙 성격이 드세서 그런 거.”

“이전 팀에서도 윗사람들하고 충돌이 잦아서 말이 많았는데.”


Z 팀장은 회사 팀장들 중 유일한 여자였고, 사내 고충처리위원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재작년 사수 일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ㅡ그때의 인사위원회장이었으니 책임자이기도 한ㅡ두더지 팀장의 성희롱 메시지 사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동기는 말을 전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너무 화가 나는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하다고도 했다. 실제로 동기는 내가 두더지 팀장에게 당하던 괴롭힘을 힘겹게 털어놓았을 때 국밥을 먹다 말고 화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린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동기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했다. 얘기해줘서 고마워. 대신 화내 줘서 고마워.


대신 울어줘서 고마워.


그녀가 내 몫까지 화내 준 덕분이었을까. 정작 나는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Z 팀장이 그보다 더한 말을 했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나를 가득 채운 감정은 분노가 아닌 후련함이었다. 그 얘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뜨문뜨문 구역질처럼 올라오던 억울함에서 자유로워졌다.


그저 우습고 또 우스웠다.

그들은 그 우물 안에서 도대체 무얼 얻기 위해 저렇게 발버둥을 치는 걸까.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우물 밖에 있었다.

나를 둘러싼 드넓은 세상에 발을 내딛고 서서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비좁고 어두운 그곳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의 머리를 뜯어먹고 있는 개구리들로 가득했다. 




퇴사 선———언


재택근무가 끝나고 사무실에 출근한 날, 나는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내게 들어온 정보는 동기의 호의로 얻게 된 귀동냥일 뿐 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게 아니었으니까. 


고작 몇 주전만 해도 ‘네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해라.’라며 한껏 으스대던 대표였다. 그는 과연 내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대가 됐다. 과연 설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도 잠잠했다. 심지어 그는 나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젝트 때문에 찾아갈 때마다 통화 중이거나 이미 외근을 나간 뒤였다. 도통 어쩌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를 Z의 팀으로 보낼 생각이었다면, 그게 프로젝트 자체를 중단하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다른 인력으로 나를 대체하려는 의지인지, 직접 듣지 않으면 도통 추측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결국 나는 일단 있어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표실을 찾았다. 그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잔뜩 구겼다. 뭔가 석연찮은 데라도 있는 모양인지.


“제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확인이 좀 필요해서요.”


나는 이미 동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간 터라 Z 팀장이 자신의 팀원들 앞에서 내뱉은 얘기 중 일부ㅡ나의 부서이동에 관한 건ㅡ를 전해 들었다고 서두를 꺼냈다. 


근데 뭐?


대표는 생각보다 더 뻔뻔했다.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고 싶은데요.”

“하... Z 팀장하고 의논했다가 그냥 안 보내기로 했어. 됐냐? 너는 지금 그걸 따지러 온 거냐?”


그는 되려 화를 냈다.


“제 거취에 관한 이야기인데 당연히 제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 안 보내기로 했다고.”


불툭하니 입과 배를 내민 채 대표는 늘 그렇듯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나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그건 알겠고. 저는 그만두려고요.”

“뭐? 뭘 그만둬?”

“회사요. 퇴사하겠다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었는지 대표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처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은 채 내려놓고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서 뭔가 정리해보기도 전에 아까의 화가 더 증폭되는 모양이었다. 


“너는 그 말하려고 와서 아까 그건 왜 따져 물어?!”


라고 시작된 그의 윽박은 한동안 산만하게 우왕좌왕하며 이어지다 뚝 끊겼다. 일단 화부터 내뱉고 난 뒤에 차차 정신이 들겠지. 익숙한 패턴이었다. 이미 숱하게 지켜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침묵하고 기다리니 대표도 곧 짜증을 가라앉혔다.


“그래서 언제까지 다닐 생각인데? 아니, 왜 그만두겠다는 건데?”


대표의 부정이 현실 자각으로 도달하며 나도 입을 뗐다. 원래 처음 계획한 퇴사 시점보다 한 달을 앞당겼다. 그는 또 한 번 격하게 동요했다. 대표는 내 결정을 도통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한 50% 솔직하기로 했다. 


대표님, 저는 지난 2년 간 이 회사에서 두 번의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어요.
그때마다 대표님께선 그저 함구하기 바빴고, 회사에서도 그 어떤 공식적인 절차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죠. 그러고도 넘어간 건 그게 저나 회사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런데 결국 대표님이 제게 하는 행동이 알려준 거죠.
인내와 침묵에 돌아오는 건 고작 그 정도의 대접일 뿐이라는 걸요.
저조차 금시초문인 제 발령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되물었다. 대표는 나를 보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입을 뗐다.


“... 내가 사수 일 있었을 때 뭐 해주려고 하지 않았냐?”


나는 이미 비웃음도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그 어떤 사후 처리해주신 적 없고요. 저는 끝까지 사수랑 프로젝트 마무리를 했어야 했죠. 그분이 먼저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는요.”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나는 무슨 말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나는 그에게서 그 어떠한 보상이나 사죄도 받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대표는 끝까지 사죄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대표의 횡설수설은 차마 문장의 형태로 적기도 힘든 것이다. 그는 나를 회유했다가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변명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어디 가서 신고라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빨리 대화를 끝내고 퇴사 수순을 밟고 싶은 마음에 입을 다문 채 그가 하는 1인극을 무덤덤히 바라봤다.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고민만 남아 있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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