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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Mar 28. 2021

에필로그

퇴사 한 달

퇴사 선언 다음날 다시 대표를 찾았다. 사직서에 결재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의 책상에 사직서를 내려놓고 미리 심을 빼놓은 펜을 잡기 좋게 그의 손 앞으로 들이 밀었다. 대표는 입을 떼려다가 다물곤 펜을 쥐고 사인을 했다. 일사천리였다. 나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 던지고 뒤돌았다. 


우물쭈물하던 대표는 내 등 뒤에 대고 황급히 외쳤다.  


“나가기 전에 술이나 한 잔 하자.”


나는 이미 반쯤 열린 문을 두고 고개만 돌려 그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봐서요.”




일신상의 사유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사직서에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었다. 그렇게 2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들이 단 여섯글자로 완결되었다. 내가 들었던 온갖 고성과 욕설, 그들 대신 느껴야 했던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끝까지 받지 못한 사과 대신 감당해야 했던 오해와 뒷담화. 그 모든 것이 한 마디에 담겼다.  


일신상의 사유


푸하, 하고 웃음이 터졌고 심플해서 좋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의 결재를 받은 뒤 사직서는 곧장 내 손에서 인사팀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사라질 운명이었다. 수북하게 쌓인 서류철 한 군데에 꽂힌 채로 먼지 쌓여갈 운명. 


딱 그 정도였다. 

나의 퇴사는 딱 그 정도로 기록되고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일신상의 사유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를 조금 풀어내보기 위해. 




퇴사는 별책부록


굳건하다고 여겼던 세계는 사수가 내던진 각티슈만으로도 손쉽게 무너졌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생채기가 크게 났다. 넘어지는 요령이 없어서였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더 이상 그 횟수 세기도 힘들어지자 내 목표는 ‘넘어지지 않기’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넘어지고 빨리 일어나기’로 바뀌었다. 농담처럼 적었고, 괜히 우스갯소리처럼 내뱉고 다녔다.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때는 일종의 샤머니즘처럼 손에 잡히는 것마다 간절히 빌어보기도 했다. 잡히던 건 주로 길가에 심어진 죄없는 화단의 나무잎이거나 술김에 넘어져서 뒹굴거렸던 흙 한 줌 정도였겠지만. 조금 그럴싸하게 숲과 대지의 신에게 빌었다고 하자. 


뭐 결국은 이루어졌으니 아량 넓은 신들께서 신앙심이라곤 모래알만큼도 없는 내 주정을 들어준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프롤로그에도 썼듯 내게는 이미 사수와 두더지 팀장 그리고 대표를 향한 그 어떠한 원망도 남아있지 않다. 그들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나를 쥐고 흔드는 동안 나 역시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강해진 모양이었다. 


넘어지는 요령이 생기고 나니 이제는 상처도 잘 안났다. 넘어지면 그냥 그러려니 먼지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그들은 내게 먼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퇴사가 결정된 뒤 대표는 TFT를 불러모아 한숨을 푹푹 쉬며 대책회의를 했다고 한다. 후임을 뽑기 위해 공고도 올리고 면접도 보았지만 다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거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지.

TFT 멤버 중 한 명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나의 출근 마지막날을 기념하며 다같이 식사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대표는 없었다.) 나도 덩달아 (비)웃음이 터졌다. 있을 때 잘하지. 아마 대표에겐 영영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하며. 


대표는 이후로도 내게 몇 번의 전화를 걸어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내키면 프리랜서로 일하라거나 조금 쉬고 연락주면 다른 일자리라도 알아봐주겠다며 딴에는 배려랍시고 이런저런 제안을 했다. 그동안 들을 수 없던 세상 인자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는 대충 웃으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있을 때 잘하지.




한 마디 말의 힘


퇴사 한 달이 지났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에필로그와 함께 회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지만 마지막 변수ㅡ퇴사 한 달 전 들려온 새로운 소식ㅡ덕분에 퇴사 역시 한 달 앞당겨졌다. 덩달아 글쓸 시간이 늘어났다. 보너스처럼 얻은 4주 동안 평일 오전에,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남을 위한 일 말고 나를 위한 글을 썼다.


사실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지난 2년 간 나를 괴롭게 한 사람들보다, 나를 헐뜯고 까내리던 사람들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응원해주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불행에 사로잡히고 고통에 눈이 멀어 손만 뻗으면 곁에 있는 그들 사이에서 겉돌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곁에 있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아마 선뜻 건네기도 어려웠을 위로의 말을 고르고 골라 손에 쥐어주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바로 그 몇마디 위로의 말이었다. 

나는 손에 꼬깃하게 쥐어진 그들의 말에 기대어 그 하루를 버텨냈다.


덕분에 숨을 쉬고 또 하루 견딜 힘을 얻었다.


글로 쓰고 나서야 알게된 것이었다. 

나의 2년은 고통 속에서 잃은 것보다 위로 속에서 얻은 것이 더 많았다는 걸.


나에게 상처 입히고 내 안에 분노를 지폈던 한 마디보다 

상처 위에 연고를 발라주고 내 안에 희망의 불씨를 지켜준 한 마디가 더 컸다는 걸. 


글로 쓰지 않으면 영영 모를 고마움이기도 했다. 




영혼을 지키는 일


글 아래는 종종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쓰는데 사람들이 와서 하트를 누르거나 몇 마디 말을 남겼다. 그 중에는 ‘이런 일들을 겪다니 힘들었겠다.’라고 나를 위로한 글도 있었고, 자신 역시 과거에 비슷한 일로 괴로움을 겪었다고 토로하는 글도 있었다.  


작가 이슬아는 그런 표현을 썼다. 

‘타인의 슬픔을 슬픔으로, 타인의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영혼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라고. 


이토록 아주 사적인 슬픔과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해준 모두에게,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갈 영혼에게 감사의 말을 담아 쪽지를 쥐어 보낸다. 


그 영혼의 아름다운 빛 때문에 곳곳에 숨은 포식자가 샘을 내며 당신을 괴롭히고 쥐어 흔들려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고통스럽고 외로워도 우리는 또 서로의 슬픔에 물들고 기쁨에 젖으며  

우리의 영혼을 다시 불러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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