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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Mar 14. 2021

퇴사 세 달 전, 지나간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삼진아웃

그 여름엔 지독한 장마가 이어졌다. 사무실 여기저기 펼쳐놓은 우산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는 직원들의 얼굴이 먹구름 그득한 하늘과 닮아 보였다. 


문득 보이기 시작한 풍경이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인재상의 정체를 알게 되자 구석구석 시선이 닿았다.


내 옆과 뒤, 같은 물웅덩이 위에 앉아 있는 동료 중 얼마가 충족하는 상(像)인지 궁금했다. 

동시에 얼마나 많은 동료가 그들의 희생양이 되었을지도.




사무실 소시오패스가 됩시다


대표의 채근과 윽박, 고성과 욕설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해갔다. 사수를 통해 이미 한차례 겪은 적 있는 일임에도 나는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대표의 태도가 고압적으로 변해가는 중에도 나는 그의 말을 정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프로젝트 추진 과정 중 의견이 어긋나는 것뿐이니 대화와 토론으로 바로 잡으려고 시도했다.


부단한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이어졌다. 종착지가 그곳밖에 없는 것처럼. 나는 실패의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 했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설득하는 스킬이 부족해서, 공부가 덜 되어서,라고.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화살 역시 나를 향했다. 

네가 아직 능력이 없어서, 열정이 부족해서, 정치질을 못해서,라고.


대표의 특기 중에는 상대방의 흠이나 약점을 찾아내 부풀리는 동시에 비아냥거리며 깎아내리는 말재간이 있었다. 그는 그 유별난 특기로 자신의 날카로운 관찰력을 뽐내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수치심에 고개 떨구는 모습을 즐겼다. 


사실 특별할 만큼 유별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숱한 회사에서 수두룩한 직장 상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스킬인 것이다. 


아마 그들끼리만 돌려보는 <사무실 소시오패스 습관의 힘> 같은 이름의 책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대표는 자신이 마구잡이로 벌여놓은 덕에 프로젝트 범위가 얼마나 광대해졌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판기처럼 버튼만 누르면 모든 데이터가 원하는 모양으로 굴러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을 배출하듯 내뱉었고, 돌아섬과 동시에 기억 체계를 리셋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 붕괴는 시간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를 부른 대표가 흥미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열심히 모으고 정리한 방대한 자료들의 파일명에 그 자료를 특징하는 모든 정보를 다 표시하자는 골자였다. 이를 테면, 제목-작성자-작성일-(여기까진 큰 문제가 없다)-카테고리-키워드(해시태그)-홈페이지에 게재될 위치-등-등-등.


농담을 하는 걸까? 그의 눈은 진지해 보였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고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면 파일의 위치나 카테고리 기준이 바뀔 때마다 모든 자료의 이름을 일일이 다 바꾸어야 한다고. 자료를 정리해 둔 엑셀 원 데이터로 분류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고. 그래, 원래 초등학생도 이해할 정도로 쉽게 설명해야 한다잖아. 마음속으로 인을 그리며.


대표는 내 말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그가 선택한 행동은 꽤 의외였다. 

그는 계속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안 되는 게 어딨어.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게 네 일이지.
못한다고 하면 네가 능력이 없다는 거고.

혀를 쯧, 하고 찬 대표는 외근이 있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대리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아집을 부리기로 한 대표의 선택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논리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이 토론은 사실 그의 승리를 위한 게임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표는 프로젝트 진행 내내 손을 놓고 앉아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남들이 떠먹여 주길 바라며 동시에 다 너를 위한 일이라며 상대방을 속이고 착취하는 것을 즐기는, 말 그대로 소시오패스였다. 


동시에 그 뒤에 숨은 진의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사실 그동안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진실이었다. 


그가 지금껏 해온 온갖 말들은 사실 지킬 수 없는 약속에 불과하단 것. 

아니 그에겐 애초에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 것. 


그만큼 당하고도 또 한 번 사람을 쉽게 믿어 버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이어졌다.


모두 다 내 착각이자, 부질없는 기대였던 것이다.




번아웃과 아웃


나와 데이지가 나름대로 타겟 고객을 설정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그려 보아도 소용없었다. 대표의 의지는 그까짓 나인 블록 캔버스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의 도화지는 계속 찢기거나 공간이 모자라 덧대어졌다. 방향이 자꾸 바뀌거나 틀어지니 어떤 길도 제대로 가볼 수 없었다. 


매번 도돌이표를 반복하니 지치는 건 당연한 거였다. 틀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틀렸는지, 어디가 잘못된 건지, 다음엔 어떤 방향을 시도해보면 좋을지에 대한 아무런 힌트가 나오지 않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었던 것이다.


프로젝트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데이지는 결국 계약 종료를 3주 남겨둔 상태에서 사직서를 냈다. 나는 그녀를 말리지도,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냥 두툼하고 기름진 고기를 듬뿍 먹이고 꼬옥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끌어안고 몸을 흔들며 서로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그래도 덕분에 버텼어. 고마와. 고마와, 하며. 




데이지가 그만둔 다음날, 대표는 나를 불러 인턴 한 명에게 데이지가 하던 업무를 넘기라고 지시했다. 


“후임은 안 뽑으실 건가요?”


나를 포함한 TFT 멤버들 모두 신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대표의 의지가 궁금하던 때였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감을 넘어 자만에 차 있던 초반의 모습을 잃고, 회의 때마다 내용을 쫓아오지 못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대표에 대한 모든 신뢰와 기대를 버린 나는 데이지까지 그만두고 나자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진 상태였다.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거나 그에 응당한 리소스를 투자할 생각이 없다면 그만두어야 한다고,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경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또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이 나왔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넌 질문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지.
사람 좀 뽑아주십쇼~ 하고.


대표는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답했으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험악한 수준이었다.

기가 차서 대답할 말도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그가 대신 말을 덧붙였다.


사람은 안 뽑을 거고. 아까 말했듯이 인턴 걔, 이름 뭐냐?
아무튼 걔한테 넘겨.
어차피 데이지 걔 1인분도 못하고 있었잖아.

나는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을 앞에 두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확실하게 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더 고민할 것도 없겠네요.




바보와 싸우지 말라


전사수와 두더지 팀장, 그리고 대표까지.

삼진

아웃이었다.


사람과 조직에 대한 기나긴 탐색의 과정이 끝이 나고 스스로 내린 판단에 확신이 생기니 마음은 급속도로 평온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불안정한 자존감과 허세를 채우기 위해 남을 갉아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몇십 년을 지나온 길 역시 그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겨우 차지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손에 잡히는 온갖 것들로 자신의 성벽을 쌓았다. 그게 남의 희생이든, 배려이든, 인내심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냥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남에게 서슴없이 악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는 거였다.


다시 말하지만, 평범한 우리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인재상인 것이다.

그렇게 얻게 될 어떠한 수식도 나는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악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글을 발견했다.


바보와 싸우지 말라. 바보는 상대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경험으로 이겨버린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래, 악이라고 말하면 괜히 있어 보이니까 바보로 격하시키자. 사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의 모양새를 보면,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 영역에 닿게 되면 알게 된다. 


모든 건 그저 그들이 발버둥 쳐서 꾸며내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1인극에 불과하지 않다는 걸. 




지나간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장마가 끝나자 순식간에 가을이었다. 바람 한 번 스치면 낙엽도 우수수 떨어졌다. 바깥세상에선 코로나가 말썽이기도 했다. 직원들 역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사무실 공기도 자연스레 침잠되어 갔다. 그 안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판결은 끝났다.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 결정이 그의 뒷모습에서 모든 거짓을 발견한 순간에 시작되었는지, 나와 데이지ㅡ우리의 진심이었던 그 모든 노력을 폄하한 순간에 확정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결코 번복할 일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은 건 시기를 정하고, 그동안 마무리할 일들을 점검한 뒤 대표에게 선포하는 것뿐이었다.


판결 이후 급속도로 평온해진 내 태도에 대표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어떤 말에도 토를 달지 않고 알겠다고 답하는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 동시에 불만인 모양이었다. 


자신의 의견이 순순히 받아들여질 만큼 타당하고 반박 불가한 (게다가 그의 기준에선 획기적인) 아이디어라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과 이제는 자신과ㅡ아니 자신만ㅡ재밌는 논쟁에 참가하지 않는 무기력한 (사실은 바보와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 내 태도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표는 TFT 회의 뒤에 나만 남겨두고 비장하게 선포했다.


일에 관심이 떨어졌냐?
너, 네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는 마스크 안에서 입술을 뭉갰다.

조금만 방심하면 입 밖으로 내뱉어버릴 것만 같았다. 


죄송하지만 그 게임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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