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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Mar 07. 2021

퇴사 여섯 달 전, 빌런은 공석인 법이 없다

우리 회사 인재상

 처음 두더지 팀장의 구역질 나는 메시지를 받은지도 여섯 달. 나는 그만둘 각오가 되어서야 겨우 팀을 옮겨갈 수 있었다. 좀처럼 정화될 줄 모르는 고인물 같은 팀원들과도 덩달아 이별이었다.


 정식 조직개편 시기도 아니었던 데다 진실을 최대한 은폐하고 싶었던 대표는 신사업 추진을 위한 인력이 필요하다는 빌미로 나를 그곳에 들여 앉히기로 했다. 그는 부랴부랴 신사업팀을 꾸렸다. 대책 없이 일부터 저지르고 보는 그답게 신사업팀은 팀장을 겸임한 대표와 나 그리고 계약직 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대표조차 잘 모르는 영역의 비즈니스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더 나은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통의 길 옆에는 또 다른 고통의 길만 있었을 뿐.




마지막 편지


 급작스런 나의 팀 발령 발표날, 대표는 두더지 팀장에게ㅡ도대체 뭐가ㅡ미안했는지 그를 데리고 거한 회식자리를 가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머나먼 자리 이동을 하고 나서 열어본 메일함에는 어김없이 두더지 팀장의 이름이 상단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며. 


 그의 메일은 혼자 애틋한 이별을 하는 양 구구절절하고 구질구질했다. 덕분에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새새로운 한 달, 새로운 분기의 첫날부터 내 미간은 우악스럽게도 구겨졌다.


나는 아직도 새벽나무가 다른 팀으로 간다는 게 현실감이 없다.
우리 팀에서 맘이 불편했다는 거니까 더 속상해... 
솔직한 내 심정은 너를 절대 안 보내고 싶었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마음이 많이 커지면 그때 다시 만나자...
쓸데없는 소리일 수도 있는데 오고 싶을 때 다시 오세요. 진짜로... 난 자기를 인정하니까...
언제 포차에서 소주나 한 잔 하자.


 두더지 팀장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내가 팀을 옮기게 된 원인엔 본인의 몫이 9할 이상이었다는 것을. 물론 그 사실은 그에겐 나쁠 게 없었다. 


 불행과 책임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팀을 옮기고 나서도 업무는 인수인계되지 않았다. 대표는 지난 사수 때와 마찬가지로 사후처리까지는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남은 프로젝트 기간 동안 두더지 팀장과 업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물론 프로젝트가 끝나고도 두더지 팀장은 틈틈이, 아주 작은 용건만 있어도 메시지 보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밤늦은 시간도 아니고, 업무 관련 요청이었을 뿐인데도 나는 메신저 위에 그의 이름이 뜰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트라우마였다.


 두더지 팀장은 업무 용건을 탈탈 털어 쓴 뒤 더 이상 연락할 건덕지가 없어지고 나서야 손가락을 멈췄다. 와중에도 명절 인사 메시지는 꼬박 왔으나, 더는 핑곗거리도 없었다. 덕분에 세 달쯤 지나고 난 뒤 나는 그와 마주쳐도 목례로만 대꾸할 수 있었다. 


 사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할 순 없었는데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후일담이지만 두더지 팀장은 이제 팀원들에게 이미 자신의 팀을 떠나 없는 나의 험담을 늘어놓는 취미가 생겼다고 한다.


 그의 말에 함께 박수치며 동조하길 즐긴다는 그들은 아마 영영 모를 것이다.

 그전까진 자신들이 그 뒷담화의 주연이었다는 것을.  




어서 와 이런 팀장은 처음이지


 다소 비장하고 다소 없어 보이게 집결한 신사업팀은 초반부터 다짜고짜 엑셀만 밟아 나갔다. 고작 3개월 뒤를 서비스 오픈 디데이로 맞춰 놓은 PM(Project Manager, 프로젝트 매니저) 덕분이었다. 신사업팀 팀장은 당연히 자신이 PM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모든 게 대표의 손에 달린 사업이었단 거다. 그는 자신이 잘 모르는 비즈니스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아,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팀원이었던 나와 데이지에게도 낯선 영역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내부 개발자 2명과 함께 TFT를 구성했다. 비즈니스 진출 초반에 으레 거치는 케이스 스터디와 시장조사에 전념하고 있는데, 대표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며 우릴 나무랐다. 주 2회 2시간 이상씩 회의를 하며 대표는 나와 데이지가 조사해온 리포트를 대충 들춰 보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떠오른 본인의 아이디어를 자랑하기 바빴다.  


 나와 데이지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신사업은 업계 동향과 이슈에 관심 있는 이들을 타깃으로 한, 어찌 보면 가장 트렌디한 서비스 모델이었다. 30대 초반인 나와 데이지는 이미 발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시장의 트렌드세터들을 보며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초조하기도 했다. 


 TFT의 나머지 멤버(개발자 2명과 대표)는 모두 40대를 훌쩍 넘긴 아재들이었다. 심지어 대표는 ‘서비스를 만드는데 타깃 고객을 왜 설정해야 하냐’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이 하던 비즈니스의 양상과 현재의 시장 형태가 전혀 다르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덕분에 데이지와 나는 우리가 모르는 지식과 스킬 습득을 위해 책을 사서 공부하면서 산출물을 내야 했고,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딴지를 걸고 늘어지는ㅡ마치 6살 난 아이 같은ㅡ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다 끌어 써야 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꽤 즐겁기도 했다. 

 머릿속에 온갖 것들을 넣고 상상하고 그려내며,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함께 자조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실컷 웃었다.




번아웃으로 가는 지름길


 신사업 프로젝트의 킥오프로부터 두 달, 대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진척이 없는 것에 슬슬 짜증이 치미는 듯했다. 그는 애초에 본인이 설정한 일정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매번 회의 때마다 이미 합의된 내용을 뒤집고 다른 컨셉으로 바꾸자며 생떼를 쓴 게 자신이었음을 잊는 듯했다. 그는 스스로 망친 판 한가운데서 왜 아무것도 되지 않느냐, 역정을 냈다.


 그때부터 대표의 타깃은 내가 되었다.

 타깃 고객 따위 필요 없다던 그는 자신의 화풀이 타깃은 기가 막히게도 잘 골라내었다.


 주 2회였던 회의는 나에게만 특별히 주 2.5회로 늘어났다. 그는 TFT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나를 대표실로 끌고 갔다. 회의라기보단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내뱉는 자리였다. 덕분에 나는 매번 대표가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서 그가 스스로에 취해 내뱉는 온갖 자아도취의 찌꺼기를 꼼짝없이 맞고 있어야만 했다. 




 나와 데이지는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며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업무 양이 도저히 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대표는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턴 6명을 계약직으로 뽑아 배치했다. 그의 딴엔 배려였다. 그리고 나는 해맑은 눈의 사회초년생 인턴들에게 제각각 다른 일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새로운 책무 또한 맡아야 했다.


 이제는 그의 담배 연기에 ‘사람까지 뽑아줬는데 왜 일을 빨리 못하냐’는 질책도 추가되고 있었다. 


 대표는 자주 답답해했다. 본인이 잘 모르는 영역이다 보니 일의 진행 내용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팀장이자 PM으로서 본인이 해야 할 역할ㅡ일정 관리, 사람 관리, 품질 관리 등등 온갖 관리ㅡ은 본인 성정에 영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은근슬쩍 내게 넘긴 참이었다. 


사업 잘 되면 팀장으로 올려줄 생각도 하고 있으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진짜 제대로 해.

 대표는 매번 그런 식으로 어찌 보면 듣는 이에게 가장 달콤해야 할 권유를 협박처럼 했다. 


 나와 데이지의 괴롭지만 즐거운 시기는 두 달도 가지 않았다. 이제는 괴로움만 남아 꿈에서까지 우릴 괴롭히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그땐 그 상태가 몸과 마음에 얼마나 독이 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일 기계처럼 출근하고, 매번 판을 뒤집고 새 판을 짜는 대표의 말을 꼼꼼히 받아 적고, 아무리 곱씹어봐도 말이 되지 않는 그의 헛소리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뇌했다. 


 그리고 매일 꿈에서 만나 퇴근 전까지 나누던 고민을 계속 이어갔다. 




우리 회사 인재상이었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사업 TFT는 계속되고 있었다. 나로선 스스로에게 죄책감 느낄 틈도 없이 몸과 마음을 갈아 넣고 있었는데 대표한텐 영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점차 표정을 썩혀 갔다. 막상 일을 벌이고 보니 애초 생각한 것보다 쉬운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게다가 대표보다 나이 많은 개발자 팀장이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했다. 이미 애초 설정한 오픈 디데이를 지나고도 사실상 가시화된 것이 없었다. (8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개발 중에 있다.)


 대표는 그 개발자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쏟아냈다. 대표와 나, 데이지만 있는 회의에서 그는 


 솔직히 맘에 안 들어, 씨발.
그거 시킨 지가 언젠데.

 라며 욕지거리를 했다. 나만 참석하는 그의 담타(담배 타임) 회의에서는 '네가 개발자 팀장과 싸우든, 술 한 잔 하면서 알랑 방귀를 뀌든 제대로 일하게 만들라'고도 했다. 대표는 그게 조직 생활에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자신이 팀장 자리를 약속했으니 나 역시 회사 편에 붙어서 

 상대의 목을 꺾든, 비위 상하는 접대를 하든 뭔가 해보란 소리였다. 


 내가 전사수와 두더지 팀장의 일을 겪으면서도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결정한 건 사실 대표의 영향도 있었다. 물론 그가 뭣하나 제대로 처리해준 건 없지만, 그땐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어쨌든 그가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이해해준 덕이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 내가 가진 강점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주는 덕이었다. 나는 대표가 매번 욕지거리를 내뱉고 사무실에서 꼬박꼬박 담배를 피워도 사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던 거다.


 그 탓이었다. 내가 회사에 남기로 한 것은.




 대표는 초조해질수록 화가 많아졌다. 피우는 담배의 양도 늘어나는 듯했다. 나는 점점 그가 무섭고 불편해졌다. 그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곧 터지기 직전인 풍선처럼 얼굴이 벌게져 한숨부터 쉬었다. 


“프로젝트가 이 지경인데 연차를 쓴다고?”
“개발자랑 술을 먹든지 해서 니 편으로 만들라고. 불만만 말하지 말고.”
“솔직히 신사업팀이 이 시간에 퇴근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그는 이제 대놓고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꿈에서도 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도대체 그의 마음에 들 방법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나와 데이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몇 날 며칠 고민한 결과는 매번 무산되었고, 대표는 매번 우리의 결점만 지적했다. 


 결국 대표는 자신 딴에는 비장의 카드를 쓰는 모양새로 TFT 모두를 모아 놓고 나와 데이지를 실컷 까내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개발자 2명이 차마 우리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는 그 회의가 끝나고도 나를 따로 불러 후렴구를 반복했다. 여태껏 응축해놓은 듯 실컷 윽박을 지르고 욕을 했다. 구절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냥 앞뒤로 뻔한 욕만 더 붙었을 뿐.


나는 그런 대표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그에게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내 앞엔 나의 작년을 지옥으로 끌고 갔던 전사수와 

시발과 존나를 떼놓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두더지 팀장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회사의 인재상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나는 평생을 다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상(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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