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식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퉁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결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지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사람은 자기만의 우물에 갇혀서 살고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정답이란 없고, 나의 우물에 갇히는 것이 두려웠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생각을 듣고, 그 사람의 취향을 공유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와 다른 사람을 동경했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 사람과의 대화는 즐거웠지만, 내가 나와 다른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부정하고 싶어졌고, 괜히 반박하고 싶어졌다.
그 과정에서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의도치 않은 논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럴 수도 있겠다." 한 마디면 좋았을 텐데.
지난 1월 샤갈 특별전에 다녀왔다.
프랑스가 너무 좋았다던 작가의 그림엔 하늘을 나는 사람이 자주 등장했다.
요정 같은 이들이 도시를 감싸고 악기를 연주하고,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이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나 좋고 행복했으면 이렇게 그렸을까 싶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슬펐다.
그림은 행복한데, 색감은 어둡고 우울한 느낌.
사람이 없는, 죽은 도시와 같은 색이어서 였을까.
흰색과 검은색, 초록과 빨강 등
다양한 색으로 대상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작가의 그림이 좋았다.
행복하지만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을 보며
신성한 존재였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속세의 존재가 되기도 하는 그림을 보며
팩트풀니스가 떠올랐고,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생각났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간 불행하고 누군간 행복하겠지.
다름을 만났을 때, 누군간 싸울 것이고, 누군간 존중할 것이고, 누군간 융합을 하려 하겠지.
생명이 종말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살아있는 동안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그것을 물들여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좋았다.
행복하지만 슬픈, 밝지만 어두운, 성스럽지만 인간적인 작가의 그림은 생명의 종말을 인정하고 바라보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묻고 싶지 않다는 것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순수와 순진이 다르듯,
때를 아예 거부하는 것이 아닌,
때가 어떻게, 얼마나 존재하는지 알고,
때가 묻더라도 사랑과 희망으로 그때를 없앨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이상을 좇는 사람이 아닌,
세상의 어둠이 어떤 모습인지, 왜 그런 모습인지 이해하고
나와의 다름을 오래 바라보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