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라는 독서 모임이 있다.
전국적으로 매우 유명한 독서 모임으로 알고 있는데, 참석해 보진 않았다. 참석하지도 않은 이 독서 모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 이름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나비. 이 단어를 들으면 일반적으로, 봄 하늘에 날아다니는, 그 나비가 떠오를 거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이 이름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말이다. 나비는 줄임말이었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 이 표현을 줄여서 나비라고 부른 거다.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부터 변화되자는 의지가 느껴졌다.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듯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내가 커다란 꿈을 품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엉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꿈을 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사내는 꿈을 조정했다. 세상까지는 어려울 듯하고,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 마음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라도 너무 방대하다는 생각에, 동네를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간이 지나서는 이웃을, 더 시간이 지나서는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범위가 점점 좁아지면서 사내는 깨닫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자기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이 말이 생겨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나부터 변화해야 한다.
주변 사람만 봐도 그렇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의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저 사람 왜 저래?’, ‘또 저런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좋은 생각이 들 리가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말이다. 이유를 살펴보면, 항상 그렇진 않지만, 나의 말과 행동 때문일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왜 저런지 모르겠다며 씩씩거리지만, 그 이유가 나한테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
누군가가 하는 말이나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바로 판단한다. 이유를 묻거나 생각하지 않고, 바로 판단하는 말이 나오는 거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떤 모임에 늦었다고 하면, 이렇게 말한다. “늦잠 잤네!” 그 사람에게 왜 늦었는지 이유를 묻지 않는다. 늦게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떠오른,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입 밖으로 내뱉는다. 이 말을 들은 당사자는 어떻겠는가? 불끈한다. 시간 맞춰서 나왔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조차 짜증 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가만히 보니, 자기 판단으로 말하는 것이 습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시작이다.
내 말이 시작이고, 내 행동이 시작이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라는 말처럼, 나로부터 비롯되는 말이고 행동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이 원리에서 비롯됐다. 부드러운 말이 나갔는데 거친 말로 되돌아올까? 뭐, 그럴 순 있다. 지금까지 누적된 잘못으로 그럴 수 있고, 겉으로는 부드러운 말이지만 그 안에 가시가 들어있으면 그럴 수 있다. 복잡한 상황 말고, 그냥 이 상황만 놓고 보면 어떨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상대방이 막무가내가 아니라면 말이다.
시작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내가 먼저 참고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고개 숙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주변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참고 손 내밀고 고개 숙이는 사람이, 졌다고 보이는가? 아니다. 대인배로 보인다. 내가 그렇게 보면, 타인도 그런 나를 그렇게 본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내가 비굴한 마음에 그런 게 아니라, 베푸는 마음에 그렇게 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모습이 진짜 옳은 모습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