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감사의 마음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입맛도 그렇다. 아이들이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전이나 요즘이나 같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탕인데, 어릴 때, 사탕을 물고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장 많이 먹었던 사탕은, 신호등 모양으로 포장된 알사탕이었다. 신호등 색깔처럼, 빨강 초록 노란 사탕이 들어 있었다. 겉면에 설탕처럼 하얀 알갱이들이 붙어있는데, 입에 넣자마자 단맛이 침샘을 자극했다. 한번 입에 넣으면, 깨물지 않는 이상, 한참을 먹을 수 있었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나 심부름을 시킬 때, 어른들이 사용했던 비장의 카드도 사탕이었다.
달콤한 사탕이 좋은 용도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아이를 유혹해서 유괴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릴 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모르는 아저씨가 사탕 준다고 해도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르는 아저씨들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어른이라는 사람이, 사리 구별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못된 행동을 하는 건, 어떤 이유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
달콤한 사탕을 앞세워, 자신의 목적을 채우려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
필자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상대방을 위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필자의 목적이 더 짖게 베었던 적이 있으니까. 다만,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언급하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목적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기에,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달콤한 사탕을 앞세운다. 사탕에만 마음이 쏠리면, 그 뒤에 숨겨진 악의를 헤아리기 어렵다. 악의를 헤아릴 방법은 묻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사탕을 주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자신은 당연히 사탕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덥석 받아서는 안 된다. 서로 사탕을 주고받을 사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사탕을 준다면 반드시 악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악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에게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할 의도가 있다고. 사람의 성의를 의심하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성의라면,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사탕을 내놓는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장을 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배가 고프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과도한 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배고픈 상태에서 장을 본 적이 있었는데, 카트를 한가득 채우고 나왔다. 보는 족족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도 너무 배고픈 상태로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정의하는 배고픈 영혼은, 부족함을 느끼는 상태다. 무엇이든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부족하고 불평하는 마음이다. 욕심의 씨앗이 자라서 만든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욕심의 씨앗은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갉아먹어, 배고픈 상태로 만든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며, 깎아내리는 일도 있다.
그것은 욕심이라고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의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의지로 표현해야 한다. 영혼의 배고픔으로, 악의로 던지는 것을, 덥석덥석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 매일 그렇게 영혼을 채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