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인간에게 선물을 어떻게 줄까?
시련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준다는 말이 있다. 이왕 선물을 줄 거면 그냥 주거나 좋게 주면 되는데, 왜 굳이 시련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줄까? 간사한 사람의 마음 때문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속담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은 급할 때는 뭐라도 해줄 것처럼 굴다가, 급한 게 해소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꾼다. 이런 경험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자기가 화장실 급한 사람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악의로 그렇게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본성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같을 순 없으니 말이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 며칠 전, 이 속담을 인용한 기사를 봤다. 궁금해서 봤는데, 머리가 삐쭉 서면서 마음이 매우 불편해짐을 느꼈다. 인용한 속담이 현실에서 그대로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불이 난 빌라에 소방관이 투입되었다. 소방관은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강제로 문들을 뜯으면서 살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가끔 보는 장면이다. 이 행동을 이상하게 보진 않는다. 오히려 빨리 뜯고 들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주민들은, 문 수리 비용을 소방서에 청구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을 모른 상태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어폐가 있다. 다만, 자기 목숨을 걸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온갖 노력을 다한 소방관에게 이렇게 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나왔으면 뭐라고 했겠는가? 뻔한 소리가 맴돈다.
신은, 특단의(?) 조처를 한 듯하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간사한 마음은 드러난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비교적 나쁘지 않다거나 좋다고 생각하면 만족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다. 이 마음을 잘 꿰뚫어, 지혜롭게 대처한 옛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가난한 부부 집에 남편의 친구가 찾아왔다. 식사 시간이라 밥상을 내야 하는데, 아내는 고민됐다. 밥도 밥이지만 반찬이 김치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해 봐야, 남편의 체면만 떨어질 게 뻔했다. 그대로 나갔다가는, 손님 대접을 소홀히 했다는 말을 여기저기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까?
아내는 시간을 끌었다.
식사 때를 한참 넘겼다. 손님으로 온 친구는 생각했다. ‘아니, 얼마나 진수성찬을 차려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일까?’ 내심 기대하기 시작했다. 배에서는 언제 밥을 넣어줄 거냐며 아우성쳤지만, 기대감으로 배속의 원망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도저히 참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문이 열리고 밥상이 들어왔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친구는 올랐던 기대보다 몇 곱절로 실망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작은 상에 밥과 김치, 딱 두 개만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배고픈 나머지 일단 먹고 보자며 밥을 뜨고 김치를 먹었다. 아니, 이런. 친구는 감탄했다. ‘이렇게 맛있는 김치가 있을 수 있나?’ 실망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김치 맛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친구는 그 어느 때보다 맛나게 밥을 뚝딱 해치웠고, 한 그릇을 더 비웠다.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김치에 뭐라도 탄 걸까? 정답은,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속담에 담겨있다. 배고플 때는 뭘 먹어도 맛있다. 물에 밥을 말아,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기만 해도 맛있다. 배고픈 것이 어떤 음식도 맛나게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매우 현명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때, 시장이 반찬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시간을 끌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배고플 때를 기다렸다가 상을 냈다. 이 또한 간사한 사람의 마음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배가 부를 땐 어떤가?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손이 가질 않는다. 배가 찼기 때문이다. 몹시 배가 고플 땐 어떤가?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찾아서 먹게 된다. 배고픈 상태로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을 때, 어떤가? 밥도 없고 국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식탁에 놓여 있는, 먹다 남은 빵 조각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지 않은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빵조각 말이다.
신이 선물을 굳이, 애써 시련에 포장한 이유가 이렇다.
그냥 주면 선물인지 모른다. 당연히 받을 걸 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한테 선물이나 도움을 줄 때도 그렇다. 생색내라는 건 아니지만, 거저 생겨서 주거나 시간이 남아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다. 안 그러면 진짜 어디서 주워 왔거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로 알 수 있다. 고마운 마음이 얼마나 들겠는가? 가치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준비했고 어떤 마음으로 주는 것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주는 그 선물이, 가치를 발휘한다. 받는 사람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긴다. 물건이나 도움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말이다. 그러니 포장지를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선물과 함께 쓰레기통으로 집어넣는 우를 범하지 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