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감동 vs 기록의 열정
10월 23일. 내게는 따뜻한 여운으로 아로새겨진, 평생 잊지 못할 프러포즈였다. 11월 26일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청첩장 모임을 진행하고, 결혼식 체크리스트를 꼼꼼히 챙겨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결혼식은 20분인데 준비 기간은 8개월이라니..." 결혼 준비를 하면서 결혼한 이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였다.
몸이 너무 피곤했던 어느 날,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잠실 갈까? 날씨도 좋은데 석촌 호수라도 걸을까?" 우리는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평소처럼, 남편과 함께 오랜만에 외출을 나설 참이었다.
남편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해 보였다. 나 역시 편한 차림으로 나갈까 망설이다가, 오랜만에 외출이니 산뜻하게 예쁜 옷을 입고 나섰다. 남편과 나는 오랜만의 둘만의 여유를 느끼며 석촌 호수길을 천천히 걸었다.
남편은 점심 맛집을 찾았다며, 나를 인도했다. 잠실새내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걸었지만, 남편은 배가 고팠는지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우리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남편의 성향을 익히 아는 터라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평범한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사실 한식 파인데, 오랜만에 양식집을 찾았다. 오일 파스타와 채끝 등심 스테이크가 나오자마자 배고픔에 야무지게 먹었다. 오랜만에 양식을 먹어서 그런지, 오늘 마음의 여유가 넘친 건지 음식이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1층 당첨>
잠시 뒤, 직원분이 우리에게 이벤트 스크래치 복권을 건네주셨다.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샘솟았다. 작년부터 운이 너무 좋아서 사연 이벤트와 복권이 자주 당첨되었던 터라 최소한 2등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쓱싹쓱싹 100원짜리 동전으로 열심히 긁었다.
"두둥! 1등이다!" 1등은 요트 투어 체험, 2등은 식사 2 인권이었는데, 사실 2등이 더 탐났다. 요트는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1등이 되었으니 기분은 정말 좋았다. 나는 남편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요트 태워줄게! 진짜 올해 운이 너무 좋나 봐. 계속 뭐가 당첨되네?"
나는 뿌듯해하며 남편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식사를 마친 후, 사장님께서 몇 등 되었냐고 물으셨다. 나는 당당하게 "1등이에요!"라고 말했고, 사장님은 운이 좋다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당일에만 사용 가능하니 시간에 맞춰 꼭 가보라고 강조하셨다.
"사실... 여기까지 들으면 눈치를 채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편보다 눈치가 더 빠르고 상황 파악을 잘한다고 자부했는데,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나는 전혀 의심 없이 내가 운이 좋아서 된 거라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감동적인 요트 위 프러포즈>
우리는 서둘러 잠실 한강공원 요트 선착장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은, 남편의 고백을 받고 6번째 만남에서 내가 '오케이'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것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요트 생각만으로 잔뜩 들떠 있었다.
직원분에게 쿠폰을 살며시 내밀고, 요트에 올랐다. 요트 사장님께서는 요트 가격이 비싸기도 하고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홍보차 이벤트를 잠시 동안만 진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신발을 벗고 요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잠시 뒤, 출발하기 전 TV로 요트 홍보 영상과 함께 요트 안전 수칙에 대한 영상이 나왔다.
그런데 안전 수칙 영상이 나오다가 갑자기 남편 얼굴이 나왔다.
사실 전에 드라마 '결혼백서'에서 이진욱 배우가 이연희 배우에게 똑같이 요트 고백을 했었다. 결혼식 전 과정을 담고 있어서 너무 공감이 돼 남편에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 뭐지?" 그때 깜짝 놀랐다. 프러포즈 영상이 나왔다. "이런 걸 또 언제 준비했지?" 우리가 만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담긴 사진과 영상 편지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좋아하는 한강, 첫 만남의 장소인 이곳에서 새 출발을 약속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담긴 고백 영상이었다.
<서프라이즈 그리고 작은 오해>
그런데... 나는 이 영상이 사라질까 봐 급히 핸드폰을 들어 녹화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남편을 슬쩍 보았다. "엥? 또 눈물을 글썽인다고?" 속으로 또 놀랐다.
그러고선 무릎을 꿇고 나에게 꽃다발과 반지를 건네며 프러포즈를 했다.
"내 평생 짝이 되어줘. 절대 네 이 손을 놓지 않을게. 살날이 기대되는 너와 함께 평생 함께하고 싶어."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 그대로였다. 오차 범위 하나 없었다.
나는 살짝 낯간지러웠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트와 연결된 방으로 가보니, 와인, 케이크,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진 액자들, 꽃다발,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선물은 내가 정말 갖고 싶어 했던 귀걸이였다. 너무 예뻤지만, 가격이 있어 말을 아꼈는데, 남편은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 귀걸이를 공수해 왔다. 정말 고마웠다. 요트 밖으로 나와 우린 롯데 타워가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같이 사진도 찍고,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를 꽉 채워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은 나에게 살짝 서운한 듯했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야. 그런데... 영상을 찍다니... 그대로 느껴야 하는 건데... 난 내가 우리의 시간이 떠올라서 눈물이 나더라. 근데 해루아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더라..."
연이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정말 고맙고 애틋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영상이 없어질까 봐, 담아두고 싶어서 고백 영상 편지를 들으면서 촬영을 했는데 남편은 그 포인트에서 서운함을 느꼈다.
사실 당시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감정이 없어 보였을 것 같다. 그날 밤의 작은 오해는 F 남편의 예상치 못한 섬세한 감성과 T 아내의 현실적인 기록 욕심이 빚어낸 우리만의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며 더욱 깊어지는 다정한 거리, 그것이 바로 우리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