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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Mar 16. 2021

고덕산 아래 역사체험길

杏仁의 길 담화_태봉 예향천리마실길

 남고산성길과 학산길이 만나는 보광재는 고덕산 등산로와 구이 평촌 가는 길도 이어준다. 남고산성에서 바라보는 고덕산(高德山·603.2m) 정상은 첩첩이 작은 산들이 가려져 꽤 먼 듯하지만, 불과 3km 남짓이다.  소나무와 잡목으로 우거져 푹신한 흙길에 오르내림도 완만해 산책하는 듯 걸을 수 있는 이른바 비단길이다. 반면에 전주 대성동 고덕산장 쪽에서 오르면 숨 막힐 듯 가파른 비탈이다. 

가을이면 활엽수들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단풍이 빼어나고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등산코스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쪽에서든 서너 시간이면 정상을 밟는다. 정상에 서면 북서쪽으로는 전주시가지와 멀리 익산까지 내다보이고, 동쪽으로는 기린봉, 치명자산 너머 멀리 진안 마이산까지, 서쪽으로는 모악산을, 남동쪽으로는 아득히 지리산 연봉들을 조망할 수 있다. 

고덕산은 완주군 구이면과 상관면, 전주 대성동에 걸쳐있다. 산 이름은 시대마다 달랐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고대산으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 또는 고달산으로 기록돼 있다. 고달이란 최고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높다리기’라고도 불렸다.  역사 속에서, 고덕산과 그 줄기에 있는 남고산성은 전주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치열한 전쟁터였다.       


 경복사(景福寺터에 얽힌 비래방장 설화

 보광재를 내려와 구이면 평촌리로 내려간다. 평촌리와 덕천리를 잇는 태봉 예향천리마실길은 역사체험길이다. 

  평촌리 화원마을과 상하보마을 사이 산기슭에 경복사(景福寺) 터가 있다. 석축이 남아있고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도 출토됐는데, 조선시대에는 36본사 가운데 하나였던 사찰이라 한다. 경복사 터에는, 보덕화상(普德和尙)과 비래방장(飛來方丈)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고덕산 서쪽 기슭 경복사에 있던 승방(僧房)은, 원래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있던 것을 보장왕 26년(667년)에 보덕이 신통력에 의하여 이곳으로 날라 온 것이라 한다. 절이 공중을 날아왔다고 하여 비래방장(飛來方丈)이다. 

불교를 섬기던 고구려가 28대 보장왕에 이르러 중국에서 발생한 오두미(五斗米)교에 이어 도교까지 받아들이자 당시 국사로 있던 보덕이 백제 땅으로 망명했다. 보덕이 제자들에게 “고구려는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업신여기니 오래지 않아 망하고 말 것”이라며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피하고자 하는데 어는 곳이 좋을꼬?”하고 물었다. 제자 명덕은 “전주 고달산에 자리 잡으면 편안하게 머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불과 며칠 뒤 절이 고달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명필 창암(蒼巖이삼만(李三晩)     

 남고진 사적비를 쓴 조선 후기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7)! 그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1~1840)과 함께 19세기 조선의 대표적 명필로 손꼽혔다.  추사가 청나라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였다면, 창암은 혹독한 자기 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풀어낸 국내파였다. 

 이들보다 두 세대쯤 전 최고 명필로 통한 원교 이광사(1705~77)가 있었다. 원교의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이어 창암이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창암체를 개발, 자신만의 필법을 구축했다. 창암은 자신이 남긴 글에서 신라의 명필 김생과 조선 중기의 원교 이광사를 사숙했다고 밝혔다. 그의 글씨체는 ‘유수체(流水體)’로도 불린다.

 창암은 가난한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오로지 글씨에 뜻을 두고 수련을 거듭, 마침내 일가를 이룬 서예가다. 그는 벼루 세 개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먹을 갈아 하루에 1천 자씩 쓰고, 베를 빨아 글씨 쓰기를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혹독한 수련 끝에 필력을 얻고, 인생 후반에는 그 필력으로 생의 양식을 삼은 직업 서예가로 살았다. 

 그는 50세에 ‘규환’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삼만’으로 바꿨다. ‘삼만(三晩)’은 집이 가난해 글공부를 늦게 하고, 벗을 사귀는 것이 늦어 사회진출이 늦었고,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다는, 인생에서 중요한 세 가지가 늦었다는 의미다. 

 처음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창암은, 그의 글씨를 본 중국인 약재상에 의해 중국에 이름이 알려졌다. 전주의 한약 건재상이 창암에게 부탁하여 적어간 약재 품목을 들고 대구 약령에 갔는데, 그 글씨를 본 중국인 약재상이 깜짝 놀라며 누가 썼느냐고 묻더란다. 그때부터 중국인들에게 창암의 명성이 알려져 중국인 제자까지 생겼다고 한다.

 창암은, 전주 옥류동에서 거주하다 만년에 공기골(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에 터를 잡고 은거하며 서예에 전념했다.       

 개인 소장품 외에 그의 글씨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지리산 칠불암과 천은사의 편액 그리고 남고진 사적비이다. 조선 후기 전주판(완판본) 7書(4서 3경)도 모두 창암의 글씨로 새겨 간행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전주는 조선 후기 출판과 인쇄문화의 중심지적 구실을 해서 판각본은 물론 필사본의 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창암의 아버지가 50여 세에 독사에 물려 죽었으므로 그는 독사만 보면 때려죽였다고 해서 고장 사람들이 장독에 뱀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 ‘이삼만’이라고도 써 붙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창암의 나이 71세 때인 헌종 6년(1840), 당시 55세인 추사가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면서 관찰사에게 청해 창암을 만나보았다고 한다. 추사는 삼례를 지나 전주에 이르러 들어오던 중 창암 이삼만을 만나보고 싶어 했고, 전라도 관찰사 이목연이 그의 청을 들어 창암을 객사로 불러 추사와 만나게 했다고 한다. 추사가 글을 청하자 창암은 “붓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며 겸손하게 사양했으나, 다시 간곡히 청하자 두보의 시 구절을 써 내려갔고 추사는 이를 보며 감탄했다고 한다. 

‘江碧鳥遊白(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今春看又過(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何日是歸年(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 

너무나 유명해서 오늘날에도 각종 서예대회마다 출품작이 많은 두보의 시 구절이다.

 추사가 9년 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다시 전주에 들렀을 때에는, 창암은 이미 한 해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출생지로 전해지는 정읍시 부전동 부무실마을(당시 정읍현 동면 부 무리) 500년 묵은 느티나무 뒤에는 그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전해지고 있다. _김행인(金杏仁.시인.마실길 안내자)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창암 선생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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