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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Apr 12. 2021

다가공원의 아픔

杏仁의 길 담화 _외세 침탈의 현장을 걷다

 서완산동 용머리고개 위 산동네에서 넘어서니, 길은 엠마오 요양병원 옆으로 해서 다가공원으로 접어든다. 

 다가공원에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배어 있다. 일제는 1914년 10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서문 밖에서 잘 조망할 수 있는 다가산 정상에 신사를 건립했다. 다가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신사를 참배하기 위해 만든 참궁로(參宮路)였고, 공원으로 건너오는 다가교는, 신사를 참배하기 위해 건넌다는 뜻으로 대궁교(大宮橋)라고 이름 지었었다. 일제의 신사 본전(本殿)이 있던 그 자리에 테니스장이 있고, 한쪽에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자를 위한 충혼탑과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비가 서 있다.      

다가공원에 있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비

 ≪전주부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 직후 일본인들이 목조의 도리이(鳥居)를 다가산 정상에 세우고 요배소(遙拜所)를 만들었다.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6년 경 전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한 곳이 바로 서문 밖(지금의 다가동)이었다. 

 전주신사는 일왕이 죽고 난 뒤 본격적으로 건립이 추진됐다. 다가산 정상에는 신사와 사무소가 건립되고 다가산 밑 광장(오늘날 천양정)앞에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웅장한 석조 도리이(鳥居)가 세워졌다. 당시 전라북도 장관이던 친일파 이두황을 비롯해 지역 유지들이 9천여 원을 거출하고, 다가산 부근 11,800평 등 땅을 고사동의 이건호 외 3명이 기부해서 1914년 10월에 완공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다가산을 이렇게 그들의 성지로 둔갑시켜버렸다. 다가산에 신사가 세워진 이래, 많은 전주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충실한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해 천황을 향해 참배하도록 강요당했다. 

 1935년경 이후 조선인들에게도 신사 참배를 강요한 일제는, 우선 각급 학교 학생들부터 동원하려 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신흥학교, 기전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가 1937년 폐교를 당했다. 

 당시 천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 참배에 응했고, 기독교의 경우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굴복했다. 이로 인해 전북 지역에서는 남장로교회 계열 146개 교회의 신도 1만 8천 명이 신사 참배를 하기로 했고, 만경, 무주, 금산 웅포 삼례 등의 각 교회에서도 신도들이 참배를 결의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일제는 기독교회의 주일예배 의식 전에 국민의례와 동방요배를 먼저 하게 하는 등 예배를 유린하는가 하면, 심지어 기존 교단을 해산하게 해 일본 기독교단 산하에 예속시키고 각 지역의 교회를 폐합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던 와중에, 1939년부터 일제는 전주 신사를 확장하는 대규모의 공사까지 시작했었다. 일제는 전주신사 확장을 위해 추가 용지 2만 7천 평 중 8천 평은 미국 예수교 남장로파 조선교회유지재단으로부터 협조받고, 나머지는 지역 유지로부터 기증받아 무려 3만8천6백 평에 달하는 거대한 신사를 계획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중지됐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다가산 전역이 일제의 신사로 뒤덮일 뻔했다.               

다가공원에서 바라보는 완산칠봉, 그 뒤로 고덕산이 보인다.

다가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다가동의 행정명칭은  다가정과 다가산에서 비롯됐지만, 지금은 이곳이 행정구역상 중화산동에 속한다. 

  다가공원에서 마주해 전주천을 굽어보는 황학대에서 전주천을 따라 산줄기를 내려가는 화산공원 동편에 신흥학교와 기전학교가 자리 잡았다. 

 신흥학교 터에는 1700년 전라감사 김시걸이 창건한 희현당이 있었다. 유생들의 학당이던 희현당에서는 18세기 말 여러 책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출판하면서 만들었던 활자는 무쇠를 녹여 만든 활자였다고 한다. 희현당은 1907년 신흥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소실되었고 학교 뒤 황학대 기슭에 묻혀 있던 희현당 사적비만이 신흥학교 교정에 남아있다.   

 황학대에서 한 굽이를 돌면 도토리골이 있으나 이 일대에 도토리나무는 흔적도 없다. 본래 이곳 이름은 돛대골이었다가 이름이 비슷한 도토리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해에서 만경강을 따라 돛배가 올라오던 먼 옛날의 이름이었을까?     

 엠마오 사랑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가 있는 지역은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 서양 종교와 교육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서양문화가 전주지역에서 발흥하는 발원지가 되는 곳이 되기도 했다.

 다가동 일대는 서문 밖 장을 형성하던 시기에 서민들이 집단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1893년 테이트와 레이놀드 목사가 완산 자락의 은송리(완산동)에 초가를 마련하고 주변 지역과 서문밖장 중심의 상인과 상민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전라도 전역에 기독교(미국 남장로회)가 세를 확장해 나가게 됐다. 

 기독교의 초창기 선교는 의료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진료를 맡았던 선교의사 해리슨과 잉골드의 노력으로 1902년 전주병원을 세운 것이 전주 예수병원의 시초가 됐다. 또 선교사 전킨이 서원 너머에 학생 10명을 모아 여자청년학교를 연 것이 기전학교의 전신이 됐으며, 선교사 레이놀즈가 살고 있는 사택에 신학당을 열어 학생 1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돼 1909년 신흥학교를 열었다.   


 다가공원 아래 천양정은 예부터 유서 깊은 활터다. 천양(穿楊)은 화살로 버들잎을 뚫는다는 뜻이다. 수목이 울창하고 물에 비치는 바위의 절경이 아름다운 이 곳에서 궁사들이 활 쏘는 모습은, 다가사후(多佳射侯)라 하여 전주팔경으로 꼽혔다. 

 이조 숙종 28년 전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물가에 정자 네 칸을 마련한 것이 천양정의 시초다. 과녁판은 서북방인 황학대 밑에 세웠다. 9년 뒤 홍수가 나 정자가 떠내려가자 다시 다가산 바로 밑에 세우고 산 이름을 따라 다가정이라 했으며, 이후 활터를 더 넓혔고 순조 때에 이르러 다시 천양정으로 부르게 됐다. 

 천양정은 무과를 치렀던 전통이 있어 사풍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하며,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해마다 전주대사습 때면 활쏘기 대회가 열린다. 

천양정을 지나 다가공원 광장에 내려서면 아름드리나무들 아래로 26기의 불망비(不忘碑)와 선정비(善政碑)가 전주의 오랜 역사를 웅변하듯 줄지어 서있다.

_김행인(金杏仁시인마실길 안내자)

다가공원 광장에 줄지어 선 불망비(不忘碑)와 선정비(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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