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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Mar 22. 2021

천년 역사 담은 기린봉길

杏仁의 길 담화_동고사에 올라 승암산까지

 후백제와 조선 오백 년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이 즐비한 천년 고도 전주. 그 역사적 발자취와 문화유산을 따라가는 도시 곳곳의 길은 숨겨진 보석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 

 이 중 첫 손에 꼽을 기린봉길은, 승암산을 지나 기린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길목마다 후백제의 역사와 산성의 흔적들이 숨어 있으며, 천주교 순교자들의 성지 치명자성지가 있다. 

 승암산 병풍바위 아래 한벽당과 인근의 오목대, 이목대는 조선왕조의 역사 속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또 전주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중기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의 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가히 천년고도의 역사를 밟아보는 길이다.        

 전주 한벽당 옆 자연생태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두고 출발한다. 이곳은 남고산성, 동서학동 좁은목약수터와 전주천을 건너 마주 보는 승암산 아래 마을 앞마당 격이다. 자연생태박물관에서 한벽당 아래로 뚫린 터널을 지난다. 옛 전라선 철길이 지나던 터널이다. 터널을 나오자 자만동 마을 전에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는 좁은 언덕길이다. 한옥마을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기린대로를 건너는 횡단보도와 맞닿았다. 

 언덕 초입 길섶에 선 비각은, 조선조 개국공신이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月塘) 최담 선생의 유허비이다. 다소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서면 무애사라는 작은 절 아래 아직도 고색창연한 산동네가 눈에 뜨인다. 전주 도심 가까운 곳에 이토록 고즈넉한 산동네가 남아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경이이다. 군경묘지 버스종점이 있는 마을, 이곳 역시 교동이다. 기린대로가 뚫리면서 한옥마을 쪽과 나뉘었지만, 원래가 이목대, 오목대, 자만동과 이어져 있는 교동 산동네이다.      

 군경묘지를 지나 동고사 쪽으로 올라갔다. 찬바람이 귓전을 때리는 겨울 숲을 걸으며 새해의 첫 기운을 모으기에 충분한 길이다. 나는 새해 초 눈 덮인 날, 이 길을 걷는 동안 사각사각 눈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이 그지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산사의 대숲 속을 따라 걷는 길은 마음을 가지런히 다듬어 준다. 

  오르막길이되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비탈진 내리막길에 이어 다시 오르막길이다. 비탈길에 눈이 쌓이니 매우 미끄럽다. 

 조심조심 기린봉 정상(표고 271m)에 오르니 온 전주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사실 그리 큰 산이 아닌데도 기린(麒麟)봉이라 이름 지은 것은 여간한 대우가 아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었다고도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옛사람들은, 기린봉 산마루에 휘영청 걸린 달을 기린토월(麒麟吐月)이라 했다. 전주 10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는 경치다. 

 묘하게도, 기린봉을 중심으로 전주를 둘러싼 산들이 굽이치는 형세다. 북으로 인봉리 동쪽 마당재를 지나 솔때백이 부근에서 서쪽으로 틀어 기자촌 앞 서낭당이를 거쳐 나가고, 남으로 웃마당재에서 남노송동 원산파크아파트를 지나 천주교 전주교구청이 들어선 간납대까지 이어지는 반달 모양이다. 

 눈을 더 멀리 들어 보면 북쪽 산자락은, 기린봉 선린사 오른쪽으로 뻗어 내려 굴총목과 석소리, 진버들을 지나 다시 솟구쳐 도당산을 이루고 전주 생명과학고 뒷산과 매봉산을 거쳐 금암동 칼바위까지 이어진다. 남쪽 산자락은 동고산성에서 전주천을 넘고 남고산성으로 향하는데, 그 옛날 전주천의 물줄기가 금암동을 지나 북쪽으로 흘렀을 것이라고 하는 학계의 추정이고 보면 완연히 후백제의 도읍을 둘러싸는 성벽의 형상이다.     

 기린봉을 내려와 승암산으로 향하는 길목,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등성이를 내려서니 길은 다시 평지처럼 편안하게 이어지다 넓고 네모진 산성 터가 나온다. 숲 속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화려하지 못하고 애잔한 빛을 띠었으되 긴 세월이 흘렀어도 그 격조를 유지하고 있는 숲 속 공간이다. 짧은 기간이나마 후백제의 도읍지로 전주를 융성케 했던 견훤(薽萱)의 성터 흔적이 남아서일까? 풍수학자 최창조는 풍수상으로 전주의 혈처를 기린봉과 승암산 자락 아래라고 했다. 

 후백제 왕궁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동고산성설과 노송동설, 전주감영설이 있으나 기린봉과 승암산 일대가 천년 전주의 오랜 역사를 품은 견훤의 왕궁과 성터의 흔적을 간직한 곳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학계의 정설이 확립되지는 않았으나 고고학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아 온 동고산성설이 맞다면 후백제 왕궁터요,노송동설, 전주감영설이 맞다면 이 일대는 왕궁을 둘러싼 성터가 아닌가.

 군산대 곽장근 교수는 전주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에서 견훤 왕궁터의 흔적이 확인됐다고 밝혀 주목받은 바 있다. 곽 교수의 발표 역시 기린봉과 승암산 자락은 왕궁을 둘러싼 외성의 흔적으로 추정했다.(2013년 11월 8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 학술대회.)

 곽 교수가 밝힌 일대는 인봉리 방죽이 있다가 일제 강점기 들어서 공설운동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그렇다면 후백제가 멸망하자 왕궁 터는 방죽 속으로 수장되고 다시 세월이 흘러 공설운동장과 주택단지로 그 운명이 바뀐 것일까? _김행인(金杏仁.시인.마실길 안내자)     

기린봉길 노선은 천년고도 전주 옛길 제5코스로 안내되어 있는 구간의 일부다. 

(전주 천년고도 옛길 제5코스 : 한벽루 - 승암사 - 동고사 - 치명자성지- 승암산 - 동고산성- 기린봉 - 아중저수지- 전주역 - 소양대교, 약 16km.)

천년고도 전주 옛길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이사장 신정일)가 ‘천년고도 전주 옛길을 걷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통해 발굴해 낸 12개 노선이다. 덕진공원, 최명희 묘소, 소리문화의 전당, 동물원, 건지산 정상, 조경단.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진 건지산 길은 1코스로, 완산칠봉과 다가산을 잇는 옛길을 2코스로 명명하고 학산길을 3코스로, 남고산성 옛길을 4코스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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