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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Apr 02. 2021

한벽당에서 돌아본 조선왕조의 뿌리

杏仁의 길 담화_전주 한옥마을, 한벽당에 서다

     

 전주천 건너로 국립 무형유산원이 서 있다. 이곳은 전주 수목원으로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가 전주팔경 중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이었다. 한벽루 부근에 비교적 넓은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전주천의 방향과 그 역할도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벽당 아래는 ‘벽옥한류(碧玉寒流)’라 하여 옥처럼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광경이 일품이던 곳이다. 조선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종 4년(1404)에 별장을 지었던 정자가 한벽당이다. 월당 선생의 이름을 따 ‘월당루‘라 하던 것이 나중에 '한벽당’으로 바뀌었다.      

 전주의 산세는 크게 만덕산을 기점으로 한 승암산 자락과 고덕산, 모악산을 기점으로 한 완산칠봉과 황방산 자락으로 나뉜다. 그 사이로 전주천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양쪽 산 기맥이 가장 가깝게 맞닿은 지점이 좁은목이요, 여기 자리한 한벽당이다.      

 한적한 냇가에서 잠시 서성이며 맑은 냇물과 어우러진 한벽당을 올려다본다. 승암산 아래로 병풍바위가 둘러쳐져 정자를 감싸고 있다. 왕조들이 일어난 좁은 목의 병풍자락이다. 바위 너머 산자락에 견훤의 궁성터가 있어서일까? 바위 아래 물이 휘도는 소(沼)에 소금 한 가마를 부어 천년 묵은 지네가 죽어 나뒹굴었다는 지네 설화가 견훤대왕의 한을 전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조선왕조의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는 병풍바위 밑에서 즐겨 놀았다,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며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비에 쫓겨 가까운 바위 밑으로 들어가 비를 긋는데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으르렁거렸다. 대장 격이던 목조는 아이들에게 호랑이가 여럿을 동시에 해칠 수는 없으니 누가 희생물이 될 것인지 옷을 던져 시험해보자고 했다. 여러 아이들이 나이가 제일 많은 목조에게 먼저 옷을 던지라 하였다.  목조가 옷을 벗어던지자 호랑이가 그 옷을 물어 삼키는지라 여러 아이들이 밀어내어 어쩔 수 없이 목조가 호랑이 앞에 나아가는데 갑자기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호랑이는 간 곳이 없고 아이들은 죄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병풍바위 밑 냇바닥에는 지금도 그 아이들의 핏물이 배어 붉게 물든 바윗돌이 박혀있다고 한다. 18세기 말의 ‘완산지’에 기록된 ‘호운석(虎隕石) 설화다.     

한벽당 아래 전주천, 냇물은 붉은 석양에 물든 채 묵묵히 흐른다.

     한벽당에서 조금 내려가면 목조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구거지 이목대(梨木臺)다. 이목대가 있는 곳은 발산(鉢山)으로 승암산에서 뻗어 나와 이어진다. 목조가 이 발산 아래에 있는 자만동(滋滿洞)에서 살았다고 하여 발리산(發李山)이라고도 한다. 예의 완산지에는 발산 아래에 있었다는 장군수(將軍樹)설화도 전해진다. 목조가 어렸을 적 여러 아이들과 이 나무 밑에서 진법을 익혀 사람들이 장군수라 하였다고 한다.      

 목조의 설화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점을 증명하듯 전해지는 이야기다. 조선 왕조는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이를 경기전이라 하여 태조의 본향으로서 전주가 왕실의 뿌리임을 분명히 했다. 태종은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고, 세종은 어진을 모신 이 곳을 경기전이라 칭하였다. 경기전이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세종은 왕조의 창업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설파하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짓게 한 왕이었다.     

 나아가 후대에 영조는 경기전에 조경묘를 세워 전주 이 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 씨의 위패를 봉안했다. 건지산에 있는 시조 이한의 묘소를 단장하자는 학림군 이육의 상소를 계기로 이득리를 비롯한 7도의 유생들이 시조의 묘당을 건립할 것을 상소했고, 영조는 중신들의 논의를 거쳐 친히 위판독(位版櫝) 전면에 전(前)자를 쓰고 세손에게 위패를 쓰게 해서 묘당을 세웠다.      

 영조 때에 논의되었던 조경단 건립은 훗날 고종 때에 실현되었다. 1898년 의정부 찬성 이종건이 건지산에 시조단을 세울 것을 요구함에 따라 건지산 왕자봉 아래 묘 앞에 단을 쌓았으며 고종이 친필로 쓴 조경단비를 세웠다. 건지산 자락에 있는 전북대학교는, 바로 이 조경단 일대의 광대한 왕실 소유의 땅 중에서  불하된 70여만 평에 세워졌으니 조선왕조 발상지 전주가 누리는 혜택이라 할 수 있겠다.   고종은 이듬해 이목대의 목조 구거지와 친필로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를, 바로 옆 오목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흔적을 기리는 비를 세워 지금도 비각이 남아 있다.      

 이목대 옆에서 한옥마을을 굽어 내려다보는 오목대(梧木臺)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이루고 돌아가는 길에 잔치를 벌였다는 유적지이다. 이성계는 고려 우왕 때 3도 순찰사로서 왜구 토벌에 나서 운봉에 있는 황산 서북의 정산봉에서 열 배나 많은 왜구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왜구의 전사한 병사들이 흘린 피가 강을 벌겋게 물들여 6,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노획한 말이 1,600여필이라 했다. 당시 왜구의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날쌔고 용맹했으나 이성계의 활이 그의 투구 끈을 맞혀 투구를 떨어뜨렸고  그 사이 이두란의 화살이 이마를 맞혀 사살했다는 역사가 전해진다. 대첩을 거둔 이성계는 귀경길에 선조들의 고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서 잔치를 베풀었고, 여기서 한나라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자신의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비쳤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포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렸다 하니, 그는 맞은편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한다. 남경대의 남쪽 바위 벼랑에는 지금도 그 시가 새겨져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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