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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샘 Jan 03. 2019

[명화와 역사] 19, 아프리카 탐험과 리빙스턴

-프레데릭 헤이빌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초상> 

[명화로 보는 역사이야기] 19, 아프리카 탐험과 리빙스턴    

 

북미의 나이아가라와 남미의 이과수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꼽히며 그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폭포인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 폭이 1.7Km인데 우기에는 수량이 늘어 2Km를 넘기도 하는 잠베지 강물은 도도히 흐르다가 108m높이의 현무암 곃복 아래로 급격하게 곤두박질치면서 요란스러운 굉음과 물보라를 일으킨다. 하얀 물보라가 500m까지 솟구치고 분당 5,500만톤의 물폭탄이 쏟아지는 폭포가 빅토리아 폭포인데,  현지어로 ‘천둥소리가 나는 폭포’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이롭고 엄청난 장관의 폭포이다.     


이런한 빅토리아 폭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55년 영국의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에 의해서였다.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랜드의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여려서부터 방직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였으나, 기독교집안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중국 의료선교사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며 중국 선교를 준비한다. 그러나 중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중국으로의 파견이 여의치 않게되자, 1841년 남아프리가로 가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업과 탐험 여행을 하면서 광대한 잠베지 강을 유럽인 최초로 목격하게 되고, 칼라하리 사막을 횡단하며 은가미 호수를 발견하게 된다. 1855년에는 드디어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하고 폭포 이름을 당시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하고 귀국하여 ‘전도 여행과 탐사자’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 성행하던 노예 무역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하게 되면서 노예무역 반대 투쟁을 하기 시작한다. 노예 제도와의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리빙스턴은, 농경 원주민과 무역상인들의 중심지가 되는 곳에 선교 본부를 설립하여 원주민들을 계몽시키고 부족들간의 협동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곳의 자연 환경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후 조건과 연락망이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위해 2차 탐험에 나서게 된다. 2차 탐험에서는 잠베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 탐험하면서 현지 노예무역의 처절한 실상을 알리게 된다. 이에 영국 정부도 그에게 모잠비크의 영국 대사로 임명하여 노예 무역에 대한 조사 임무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66년에 그의 마지막 3차 탐험에 나서게 된다. 당시 수세기에 걸쳐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던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 경영을 위해 아프리카 내륙에 대한 지리적 정보가 무척이나 중요하였다. 특히 세계 4대문명중의 하나인 이집트 문명의 근간인 길이 6,671Km의 나일강의 발원지는 수세기동안의 미스터리였다. 당시 다른 탐험가였던 스페케는 빅토리아 호수(이 역시 여왕의 이름을 딴 호수임)를 발견하고 나일강의 발원지가 빅토리아 호라고 주장한 반면, 또 다른 탐험가 베이커는 앨버트 호가 발원지라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세계 최고의 탐험 협회였던 영국의 왕립 지리협회의 지원으로, 리빙스턴은 1866년 나일강의 시작점을 찾기 위한 세 번째 아프리카 탐험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이번 탐험은 무수한 곤경에 처하게 되고 열병으로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 탐험을 강행하던 리빙스턴은 연락이 두절된 채 실종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그를 찾기 위한 노력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미국 뉴욕헤럴드의 기자였던 헨리 스탠리에 의해 1871년 우지지에서 발견되게 된다. 리빙스턴은 스탠리와 함께 같이 탐험을 계속하여 나일강의 수원이 빅토리아 호수에서 앨버트 호로 거쳐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일강이 수원지가 빅토리아 호임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귀국을 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하다가 1873년 열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그의 시신은 영국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스탠리는 귀국 후 ‘나는 어떻게 리빙스턴을 찾았는가’라는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 리빙스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를 개척한 이후 아프리카 농장을 소유한 유럽인들의 사랑을 그린, 로버트 레드포드, 메릴 스트립 주연의 1986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오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https://www.youtube.com/watch?v=QAUSsO8_vLo     

++ 프레데릭 헤이빌 (Frederick Havill, 1815~1884)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oil on canvas, (1873), 112 Cm x 86 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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