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우스 디킨슨 <글래드스턴 내각>
[명화와 역사] 20. 거문도 사건과 글래드스턴 (1885)
거문도는 우리나라 남해얀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그런데 이 극동의 작은 섬이 19세기말에 전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거문도 사건은 1885년 당시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에, 영국이 마음대로 이름붙인 해밀턴 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리던 거문도에 영국 해군이 2년동안이나 무력으로 강점해 주둔했던 사건이었다.
영국은 이 사태가 있기 40년 전인 1845년 사마랑(Samarang)함 선대의 에드워드 벌처 제독에게 명하여 거문도 조사를 하였다. 이들은 거문도 일대를 샅샅이 조사하고 심지어는 거문도에 정박하면서 주민 성향까지 파악해 본국에 보고했다. 영국은 당시 해군성 장관이던 조지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이라 명명해 놓고 유사시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까지 수립했다. 영국이 이렇게 조선의 작은 섬을 40년동안 연구하고 준비를 한 것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던 중 1885년 아프카니스탄에서 영국군이 공을 들여 키운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에 의해 전멸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사건의 불똥은 엉뚱한데로 튀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던 영국 해군은 3척의 전함을 거문도로 급파하여 4월 15일 하루만에 거문도를 점령하고 병사가 주둔해 버렸다. 그리고 청, 일본, 러시아 등에는 거문도 점령사실을 바로 알렸으나, 조선은 한달 후에야 겨우 청나라를 통해서 이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영국은 1883년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어서 1884년 영국 공사가 상주했음에도 조선을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거문도는 우묵배미 항구로서 바다의 천연요새였다. 항구는 항상 호수처럼 잔잔하고 섬 넓이도 충분하고 물도 넉넉해서 해군기지로서 적합할 뿐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해군기지의 목을 죄는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영국은 거문도 주민 300명을 동원해 10여채의 막사, 병원, 창고 등의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력으로 강점했음에도 토지 사용료를 비불하고 인부들의 임금도 지불하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4월은 춘궁기였는데 영국군이 와서 임금도 주고 토지사용료도 지불해주니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구제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어쨌든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 해군의 단호한 태도에, 처음에는 격노했던 러시아는 이후 영국해군에 겁먹게 되어 별다른 위협을 일으키지 않고 남진정책을 보류하고 있자 별로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영국 해군은 주둔한 2년동안 여가시간을 보낼 여흥거리를 찾게 되었고 그 바람에 거문도 주민들은 테니스, 당구 같은 색다른 서양문물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군은 흐트러지기 쉬운 기강을 바로잡아 대민 문제가 없도록 장병 단속도 확실하게 해서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고 한다. 영국은 이후 러시아와 협상을 해서 향후 10년간 러시아가 더 이상 대한해협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 1887년 강제주둔 2년만에 철수를 하게 된다.
당시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은 그의 숙명의 라이벌 디즈레일리와 번갈아가며 수상을 네 번이나 역임하여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자유주의자였던 그의 패권주의는 조선의 작은 섬 거문도에까지 미쳐있었다. 그러나 130여년전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우리나라의 작은 섬에서 패권 경쟁을 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의 정부는 처음에 이 섬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고, 강제 점령에 대한 항의조차 제대로 못한 씁쓸한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 로우스 디킨슨 (Lowes Cato Dickinson, 1819~1908, 영국의 정치초상화가), <글래드스턴 내각 (Gladstone's Cabinet of 1868)>, oil on canvas, (1869-1874) , 204cm x 317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