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샘 Jan 19. 2019

[명화와 역사] 21, 청일전쟁과 동학운동 (1895)

미즈노 토시카타 <청일전쟁을 묘사한 목판 시리즈>

 [명화와 역사] 21, 청일전쟁과 동학운동 (1895)


 19세기말 팽창하던 제국주의의 세계정세의 흐름도 못 읽던 조선에서는,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에 참다 못한 농민들이 대거 난을 일으킨다. 바로 녹두장군 전봉준이 휩쓸던 동학농민운동으로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하여 전주성까지 점령하지만, 외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여 자진해산하였다. 그러나 무능하고 겁많은 조선의 왕실은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청군이 출병하였다. 그러자 갑신정변 때 체결한 텐진조약의 ‘한 국가가 출병하면 다른 국가에 알려야 한다’는 조항에 의거해 일본도 조선으로 군대를 파병한다.

위해위 전투에서 항복하는 청군 사절을 그린 일본의 그림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전 직후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구호 아래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벌여 빠르게 서구화를 이루어 나갔다. 1864년 태평천국의 난도 진압하면서 군사적으로도 서구적 군대체제를 갖추었다. 반면에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이후, 초기 지...도자들은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양이파로서 출발했지만, 이들이 영국 등 서양의 군사발달과 경제발달을 직접 목격하고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모두 개국파로 바뀌었다. 또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해외 침략을 벌이는 일이 최선이라 여기고, 1872년 징병제 실시, 1874년 대만 모란사 출병에 이어 1876년에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의 쇄국정책을 풀게 한다.

모란사 사건으로 대만에 출병한 일본군


양국의 군사력에서는 겉으로는 청나라가 앞서 있었는데, 특히 청나라 해군의 북양함대에는 독일에서 들여온 7천톤급의 장갑군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던데 반해, 일본 해군의 최대 톤수는 3천톤급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서태후가 이화원을 짓느라 북양함대의 예산을 다 써서 포탄도 제대로 못갖춘 상태였다. 그러던 중 청과 일본이 서로를 견제만 하고 있던 사이에 1894년 4월 조선에서 동학농민들이 봉기했던 것이다. 이때 조선 정부의 섣부른 원군요청으로 청은 북양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천오백명의 청나라 군대를 아산에 파병하였다. 이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4천명의 병력을 제물포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영국에게 조선이 러시아에게 넘어갈지 모른다고 영국을 설득하여 청과의 전쟁을 묵인 받았다.

성환 전투. 이로써 남북으로 일본을 압박하려던 청의 전략은 실패했다
풍도 해전에서 가라앉는 청나라의 군함

일본은 먼저 경복궁을 장악하였고, 아산에서는 청일간에 해전이 벌어졌으나 청군이 패배하였고, 육지에서의 성환전투에서도 청군은 패배하여 평양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일본은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일본으로서는 임진왜란 이후 3세기만에 치른 중국과의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당시 청군 전사자는 2천명, 일본군 전사자는 162명이었는데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조선의 백성들이 청군의 지원부대로 강제동원되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한편 해산했던 동학도들은 전봉준의 남접과 최시형, 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하여 10만명의 연합군을 만들어 공주 우금치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화승총 몇백정에 대부분 죽창으로 무장한 비정규군이었고, 이를 토벌하려는 일본군은 2천명에 불과했지만 최신 소총과 대포, 기관총들로 무장하였기에 패퇴하였고 전봉준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여순 전투

이후 일본군은 황해해전에서도 청나라 북양함대를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순조롭게 황해 뱃길을 통해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 요동반도에 진군했다. 이후 여순전투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청군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여 서양 열강들에게 야만인으로 비난을 받았다. 끝까지 버티던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항구에 쇠사슬을 치며 방어했던 위해위 전투에서 패하자,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에게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자결하였다. 그리고 청나라는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청이 요동과 대만 등을 일본에 할양하고 2억냥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데 합의 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는 포기하게 된다.

황해 해전 모습

청일전쟁이후 조선은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임이 드러났고, 청나라는 청황실의 무능을 드러내며 손문을 중심으로 한 한족들의 민족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은 이후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일으켜 청나라 대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완전히 장악함은 물론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 청일전쟁과 명성황후의 이야기를 다룬 최은희 주연의 우리나라 영화 ‘청일전쟁과 명성황후’ (1965)
https://www.youtube.com/watch?v=UnIMJox6rtc

 ++ 미즈노 토시카타 <청일전쟁을 묘사한 목판 시리즈 : 위해위 전투에서 항복하는 청군 사절> (1894~5), 종이에 인쇄된 목판화, 보스턴 미술관, 미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