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섬지기}의 두 번째 편지 : 美, 고향에 계신 아름다운 당신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짧게 보낸 안부문자에 연휴가 끝나고야 긴 답신이 왔네요.
어제부터 이 문장들을 읽고 또 읽어요. 은아! 건강하자!
10여 년 전 선생님의 장례식에서도 떠나는 내게 웃으며 당신이 건넸던 한 마디, 은아! 건강하자!
그 한마디가 커다란 주문처럼 늘 나를 에워싸고 보듬어준 걸 기억합니다.
언젠가부터 당신과의 안부전화 내용도 주변 어른들의 건강상태, 또 우리들의 건강에 대한 이슈가 주가 되었네요. 그게 현실이기도 하고, 매일이 다르게 약해지는 내 몸에 대해 이제는 적극적으로 챙겨야 할 나이가 된 탓도 있겠지요. 저는 2019년부터 해마다 큰 수술도 하고, 회복하는 과정도 길었고, 수술이 반복되면서 체력이 무척 약해졌어요. 자세히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자주 노인이 된 내 모습을 심각하게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좋지는 않다,라고 하면 정확하겠어요. 몸의 여기저기가 낡아가고 쇠약해진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두렵기도 해요. 그런데 아픈 동안 뭔가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어린 시절의 한때는 일찍 죽어야겠다 적극적이던 때도 있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건방지게도) 심근경색으로 죽고 싶다 주문처럼 읊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하나씩 목표하던 일을 놓아버리고, 하고자 욕심내던 마음을 내려놓게 되면서 내가 가진 마음의 불안, 무거움 들도 덩달아 가벼워졌던 것 같아요. 난 언제부터 이리 무거운 존재가 되어 살아온 건지, 이렇게 짓눌리면 몸도 마음도 힘든 게 당연하잖아요.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씩 벗어내도록 돕는 일 중에, 운동과 산책도 있고, 글쓰기도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가 이렇게 당신과도 무엇에 대해서든, 특히 죽음에 대해서도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행복한 미래의 어느 날 중 하루의 모습입니다.
고향을 지키고 계신 당신에게 이번 명절 역시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늘 생각 없이 받던 밥상, 입고, 마시고, 이동하고, 무언가를 사용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 모두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희생으로 이루어진 걸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아직도 너무 많네요. 우리 앞의 현실은 늘 무겁기만 하고, 사링하던 이들의 노화, 질병, 죽음도 부담스럽지만, 그런 많은 것들은 실재하니까,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게 진짜 삶을 살아가는 어른이겠지요. 내가 열아홉에 처음 만났던 어른답던 두 분, 선생님과 당신. 이제 선생님은 우리 곁에 없지만, 소중한 당신과 일상의 힘겨움, 굴곡과 그림자, 빛과 어둠에 대해서 얘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더 자주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만나면 타로 봐드리려고 했는데, 직접 만날 때까진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요. 지금 당신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카드 세 장으로 뽑아보았어요. 카드상으로는 당신이 주변 사람들의 화합과 평온에 큰 역할을 하시는 것 같아요. 명절의 부담감 또한 이런 것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다만 너무 오래 이 같은 일상이 지속되면 주변인들도, 나 자신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안일해질 수 있고, 내가 무의미하게 희생만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홀로 소외된 듯 느낄 수도 있고요. 잠시 좁아진 시야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런 힘겨움에서 곧 회복되실 걸로 보여요. 절제 Temperance, 열네 번째 메이저 카드가 당신께 필요한 에너지를 보여주네요. 분명 현실과 이상의 적절한 지점을 찾아가는 중일 거고, 당신은 결국 나 자신과 모두를 만족시킬 최적의 비율과 방식을 찾아내실 거예요. 중용은 당신과 잘 어울려요. 가끔 지나치게 업되고 다운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당신에게 중용은 더 큰 의미가 있고, 그 모든 순간이 다 당신이니까. 난 그 모습이 정말 좋아요. 그만큼 열정도 사랑도 넘치는 분이시니까요.
10대, 20대 내내 선생님이 저에게 좋은 주문을 던져준 감사한 존재였다면, 이젠 그의 동반자였던 당신이 제게는 선생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네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제는 조금씩 가까워져 안부도 묻는 사이가 되었으니 저는 더 바랄 것 없이 그저 감사합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죽고 나면 끝인 것 같더니, 이렇게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눈 속에 영영 빛나는 거로구나,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원래로 돌아가는 것. 그가 남긴 추억과 존재의 기억을 남은 이들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돼요. 언젠가 여기까지 찾아준 당신과 따님 S와 헤어지며 포옹할 수 있어 정말 고마웠어요. 그때부터 내 마음이 더 든든해진 것 같거든요. 오늘이 S의 생일이니까, 당신이 고생해서 첫아이를 낳은 날이네요. 그 얘기도 언제 실감 나게 듣고 싶어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는 길을 걷고 있단 사실이 늘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면 이젠 더 건강한 쪽으로, 빛이 있는 곳을 선택해 나아갈 거예요.
정말 건강해요 우리. 건강하게 곧 만나요.
그리고 힘들 때 문득, 그냥 오세요.
숲섬에서 기다릴게요.
숲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