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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Sep 18. 2024

삶의 주기를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가는 길. 문득 땀이 차올라 보니 나 혼자 두꺼운 롱패딩에 한겨울 바지를 입고 있다. 가족이 입원하면 희한하게 몸이 춥고 몸살기운이 있다.


그러고 보니 둘째 아이가 한동안 중환자실 신세를 졌을 때가 겹쳐 보인다. 또렷이 기억하는 5월 따스한 어느 날, 나 혼자 두꺼운 니트가디건을 걸치고 길을 걸으며 봄 옷차림의 사람들과 이질감을 느끼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늘한 병원 대기실에 있다 보면 계절감을 상실하고 몸도 축나 마냥 춥게만 느껴졌던 봄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신생아중환자실로 옮겨져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의 감염과 싸웠다. 거진 백일을 병원에서 지냈으니 생사를 오가는 순간도 많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때 지인들의 위로 중 가장 힘든 건 병원의 다른 중증 아이를 보며 “그래도 네 아인 더 낫잖아”라는 거였다. 다른 누군가는 우리 아이를 보며 짠한 눈길로 그런 생각을 하겠구나 싶었고, 다른 이의 슬픔을 발판 삼아 위안을 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는 이제 문제없이 자라고 있고, 나 역시 진료실에서 아픈 가족을 돌보는 가족을 보면 주책맞게 같이 울어버리는 문제 외에는 큰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다.


아버지가 입원하자 아이가 입원할 때랑은 또 다른 슬픔이 밀려왔다. 같이 공유하는 추억과 감정이 너무 많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찌 되었든 아이는 회복이 되어 내 곁에 계속 머물러줄 것이라는 믿음이 점점 커졌지만, 아버지는 입원을 수차례 하면서 점점 늘어나는 진단명들을 보며 힘든 예측이 많이 들었다.


부모님이 쇠약해져 가고 젊은 날의 생기와 패기를 잃어가고 판단력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내가 (부모님이 어린 나를 돌보았듯이) 부모님을 돌봐야 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퇴원하고 조금씩 힘을 찾아가는 시기에 나는 이제는 너무 늦은 가족여행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금만 더 나아지면 부모님을 모시고 1박 2일이라도 다녀오자 하는 생각. 그러면서 그만큼 회복되지 않는 아버지의 상태가 조바심이 나고, 속상하기도 했다. 실은 아버지가 그 정도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1박 2일은커녕 단지 몇 시간도 함께 외출해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을 인터뷰하고 엮은 책으로, 부모님에게 도움이 될 부분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펼쳐 들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오는 변화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을 찾아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부모님은 지금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고 저 멀리 있는 언제 가능할지 모르는 꿈을 꾸는 것보다는, 현재의 컨디션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에 집중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는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다. 부모님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간 나의 생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던 부모님과 시간 보내기를 조금 더 앞쪽으로 당겨오고, 언니와 정기적으로 부모님 댁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지나치게 부모님을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정의 내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정해주고, 따르게 하는 건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더 기능이 떨어지게 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잔소리와 과도한 배려도 최대한 줄였다.


아버지는 퇴원 이후 다행히 삶의 의지를 되찾고, 전반적인 컨디션이 나아지고 있다. 여행은 무리이지만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즐기고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덜어내자 한결 삶이 편안하게 만족스럽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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