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

비밀의 화원 - 이상은

by 꼬르륵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새들은 걱정없이

아름다운 태양속으로

음표가 되어 나네

향기나는 연필로 쓴

일기처럼

숨겨두었던 마음

기댈수 있는

어깨가 있어

비가 와도 젖지 않아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비밀의 화원 -이상은)


언젠가 남편을 보고 있을 때였다. 십여 년 전 만났을 때보다 살짝 귀 옆에 흰머리도 나고, 체격도 더 커진 남편이 앉아있었다. 성격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차분해지고, 더 많이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 남편을 보자니 '상전벽해(뽕나무밭이 변하여 바다가 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남편이 뽕나무밭이라는 거냐는 누군가의 우스갯소리가 떠오르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 남편은 많이 변했다. 더 너그러워지고, 잘 참는 사람이 됐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남편은 내게 늘 말한다.


"당신도 많이 변했어."


그리고 이어 신이 나서 말하곤 한다.


"당신은 눈도 순하게 동-그레지고,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예전보다 지금이 사람이 훨씬 나아."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옛 자아가 툭 튀어나오며 '당신이 무슨 기준으로 날 평가해?'라는 말이 떠올랐지만(예전의 나는 좀 그랬다) 이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도 떠올랐다. 예전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신기하게 요즘 나는 '내 탓이오'가 썩 잘된다.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아니라 어떤 상황은 나로 인해 벌어지거나 심각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살면서 겪었던 모든 일 속에서 사실은 그 일이 나의 부족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니 상대방에게 고맙기 시작했다.


별말없이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해놓는 남편, 어린이집에서 잘 놀고 잘 먹고 지내주는 아이들, 엄마가 짜게 싱겁게 해도 그러려니 케찹을 더 뿌려먹거나 밥을 비비는 아이들, 내가 누군가에게 대단한 희생을 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누군가 나를 이해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것도 고마울 때가 많다.


안정적일 줄로만 알았던 직장이 흔들리고, 경제적으로 빠듯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내 곁에 있을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약해지고, 언젠가는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더 자주 인식하게 되는 나이가 된 지금도 오히려 나는 이 불안이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더 늦게 이런 불안을 맞딱뜨리지 않은 것에.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불안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줄 안 것에.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난 자리였다. 오랜만에 만나 지난 직장생활 경험담을 나누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보니 내가 그 팀의 '빌런'이었더라고."


자기는 다 잘하고 남이 다 문제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그런데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 최대의 빌런은 사실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 우리는 살면서 내 삶의 불안요소들이 생길 때 남을 원망한다. 그 대상이 부모가 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고,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잘 알지 못하는 제3자일 수 있다. 계속해서 빌런을 찾아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남탓을 하다보면 잠시 후련할 수 있지만 해결책이 없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될지를 생각하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속으로는 다들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남탓을 하거나 상황 탓을 하며 불안에 잠식된다. 그리고 나를 계속해서 그런 불안의 시간에 방치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 인생의 빌런이 되는 것이다.


정말 힘들고 아프겠지만, 때로 나를 '남'이라고 생각하고 냉정하게 봐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지금 그 기분과 그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게 과연 나에게 좋을지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니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남이라고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운동"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 무인카페 사업을 잘 키우는 일, 아이들을 잘 돌보는 일. 그리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라디오pd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음악을 듣고 라디오를 듣는 일이었다. 내가 나를 남이라고 생각하니 나에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나는 불안한 시기에 내 스스로가 내 인생에 빌런이 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나의 인생에 항상 꽃길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외적인 요인으로 인한 불안은 어쩌면 사는 동안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황이 나아져 해결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어떻게 내 안에 평정심을 유지하는냐, 불안감을 어떻게 다루느냐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안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는지, 힘들어만 하지 않고 어떻게 지냈는가에 따라 다음 단계의 내가 결정이 될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한 어른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번에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저는 이 어려움이 참 반갑더라고요. 이 위기를 이기면 또 나에게 어떤 복이 오려나 싶고요."


득도의 경지에 오르신 듯한 그분의 말을 듣고 있자니 경이롭기까지 했지만 생각해보면 인생은 그렇다. 위기와 어려움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안식과 생각지못했던 보상의 순간.


그러니 나는 이 불안의 시간을 더 알차게 잘 보내련다. 며칠 전 읽었던 '리버보이'라는 책에서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글을 맺고자 한다. 책의 주인공인 열다섯 소녀는 영혼의 단짝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생전에 할아버지가 그리워하던 강에 할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며 깨닫는다. 때로는 굽이치고, 부딪히지만 강물처럼 인생도 계속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이란 가장 슬픈 날 가장 행복하게 웃는 용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것을.


어른이지만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어리다. 불안은 어쩔 수 없는 성장통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은' '비밀의 화원' 노랫말처럼 누구나 조금씩은 틀린다. 실수투성이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당신도 다시 웃을 수 있다. 아주 행복하게. 반드시.


(글속에 등장하는 노래)

이상은 - 비밀의 화원

https://www.youtube.com/watch?v=mrDL_A9hw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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