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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Nov 27. 2023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닙니다.

2022년 6월 즈음에 작곡 레슨 과제물로 탑라인(멜로디) 작곡을 한 후로 1년 반 동안 작곡을 하지 않았다. 멘토로 여기는 작곡가님께 레슨을 받기 전에 개별 상담 시간을 가졌는데, 그 당시 작곡한 곡에 대해 혹평을 들었었다. 그전부터 몇 차례 만나서 친분도 있고, 스승 같은 분이라 조언에 대해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피아노 연습, 화성학과 리듬 공부 등을 어느 정도 한 후에 작곡을 다시 (제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는데, 그렇게 흐지부지 1년 반이 지나가 버렸다. 물론 이 1년 반 동안 시간적으로 프리한 파트타임 일을 하다가 9 to 6 직장에 들어간 것이 작곡을 못한 핑계는 될 수 있겠지만, 그건 정말 핑계일 뿐이다. 내 마음속에 음악과 작곡에 대해 자신감을 많이 잃고 두려운 부분이 있었던 걸 부인할 순 없다. 7개월 전부터 피아노 연습은 거의 매일 했지만, 그것이 작곡을 못(안) 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는 될 수 없다. 나는 작곡가가 되려 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작곡이 메인 활동이 되어야 하고, 매일 습작을 만들고, 적어도 2주에 한 곡 정도(내가 만난 프로 작곡가가 연습생들에게 권하는 최소 주기)는 완성해야 했었다. 


그분이 내게 혹평만 한 것은 아니다. 격려도 많이 해주셨고, 또 다른 곡에 대해 기획사에 데모를 보내보라고 권하신 분도 그분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질책에만 꽂혔을까? 안 그래도 자신감과 확신에 없던 차에 그런 질책을 들으니 '그럼 그렇지. 아직 멀었어. 지금은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때지. 실행할 때가 아니야' 하는 생각이 더욱 굳어져 버린 것이다. 사실 그 멘토님은 그런 의도로 내게 뼈때리는 충고를 해준 게 아닐 것이다. 완전 초보(멘토를 처음 만났을 때)일 때는 격려 위주로 해주셨지만, 이제는 성장하려면 좀 더 현실감 있는 조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쓴소리를 하신 걸 테다. 


그분은 내가 '화성학을 깊이 몰라 다이어토닉 코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뻔한 코드 진행만 쓰는 것 같다'고 하자 뻔한 코드 진행으로 일단 곡을 쓰고, 사이사이에 아주 약간만 색다른 코드를 대입하다 보면 새로운 작곡을 시도할 수 있고 발전할 것이라 했다. 또 꾸준히 작곡하는 마인드에 대해 이전 곡과 단 1%만 달라도 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곡을 계속 쓰면 된다는,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해주셨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훌륭한 조언보다 질책에 더 사로잡혔다. 주위를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말에 더 잘 꽂히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인 양 믿어 버린다.


초등학생 시절에 부모나 교사로부터 '너는 그림을 참 못 그려', '너는 음악에 소질이 없어'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은 어린이가 그 분야에 흥미를 가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내가 커서 보니, 그런 말과 평가는 다 부질없다. 차근차근 오래 해봐야 알 수 있다. 재능의 씨앗에 대해서는 아무도 타인을 속단할 수 없다.


최근에 유명한 작곡가 겸 가수가 유튜브에 나와 자신은 마음속에 완성된 것만 표현한다(만든다)고 했다. 완성되지 않은 걸 꺼내다 보면 억지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최근에 친구에게 CM송을 의뢰받은 후에 원하는 게 딱딱 나오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다. 친구는 윈터플레이의 <해피버블> 같이 상큼하고 산뜻한 곡을 원했다. 나는 대충 그런 느낌은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그려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만들어냈고, 친구는 결과물에 아주 만족해했다. 부족한 확신을 갖고 시작해도, 하다 보면 훌륭한 작품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지금이 기다릴 때가 아니다'란 확신에 쐐기를 박은 건 지금 읽고 있는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이란 책이다. 이 책에서는 분야가 협소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외부인들이 해결한 사례를 많이 보여준다. 




이노센티브가 그 개념을 보여 준 이래로, 고도로 전문화한 분야에서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해결자를 이용하려는 기업들이 더 많이 등장했다. 캐글 Kaggle 은 이노센티브와 비슷하지만 기계 학습 분야의 도전 과제들을 올리는 곳이다.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배우도록 고안된 인공지능을 말한다.


중국 창사에 사는 슈빈 다이는 이 글을 쓰는 현재, 4만 명이 넘는 기여자들 중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있는 캐글 해결자다. 그는 낮에는 은행을 위해 데이터 처리를 하는 팀을 이끌지만, 캐글을 통해서 기계 학습에 손을 댈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인간의 건강 및 자연 보전과 관련된 문제들을 선호한다. 위성 영상을 써서 아마존의 자연적인 삼림 상실과 인위적인 상실을 구별하는 경연에서 우승해 3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다이는 캐글 블로그에 경연에서 이기는 데 분야 전문성이 얼마나 중요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분야 전문성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진) 방법을 쓰는 것만으로는 경연에서 이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하지요」


컴퓨터과학 교수이자 기계 학습 연구자인 페드로 도밍고스는 내게 말했다. 「캐글 건강 문제 경연에서 이기는 사람들은 의학 교육도, 생물학 교육도 전혀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정한 기계 학습 전문가도 아닙니다. 지식은 양날의 칼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게 해주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못 보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p.254




유레카!!!  할렐루야!!! 그래, 이거다. 내가 몰랐던 게 이거다. 장애처럼 무지도 극복하는 게 아니다. 무지는 나의 자원이었던 거다. 내가 빨리 벗어버려야 할 때묻은 껍데기가 아니란 얘기다. 유명한 작곡가들 중에 비전공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박시춘, 김수철, 서태지, 조영수, 박근태, 김도훈, 박진영 등등 수두룩하다. 전문지식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버클리 등 실용음악과 출신은 모두 대중가요계에서 인정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음악 이론이 먼저 생기고 음악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란 걸 생각하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나처럼 당신도! 왜 두려워하는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경력이 짧아서? 학력이 낮아서? 나이가 많아서? 그래서 마냥 준비만 하고 기다리는가? 3년 후나 5년 후에는 어느 정도, 혹은 완벽하게 준비해서 그때 필드로 나갈 생각을 하는가? 지금 나는 공동 작곡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곡을 쓰고 있는데, 사운드 창고라 할 수 있는 Splice.com에서 유료 결제를 해서 샘플들을 사용한다. 지금은 프로들도 다 이용하는 곳이므로 거부감이 없다. 멜로디나 반주 일부는 내가 직접 연주하기도 하지만, 좋은 샘플들을 많이 쓴다. 샘플들을 이어 붙이는 데도 감각이 필요하다. 사운드의 질감에 대해서는 이전에 오디오에 취미를 가졌던 때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된다. 비올 때 뽕짝을 들으면 기가 막힌 앰프와 스피커가 따로 있고, 끈적한 일렉 기타 사운드를 황홀하게 들려주는 장비도 있고, 다소 시니컬하게 클래식을 듣기 좋은 장비도 있다. 물론 장비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다. 공간과 그날 청자의 기분에도 좌우된다. 이런 수많은 변수와 감각들을 결국 직접 해 보면서,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곡 작업도 초반에 상당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하다 보니 하나씩 해결이 되더라. 나는 음악 전문가나 전공자가 아니므로 주변에 물어보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이상하냐? 좋냐? 자연스럽냐?" 주위에 자주 물어본다. 이 모든 활동이 결국 작곡이다. 나는 계속 작곡이라는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비전공자의 괄목할 만한 성과나 성취가 대단한 의지나 독한 인내의 결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도) 하다 보니 되니까 또 계속한 거였고, 그래서 발전하고 성장하고 이룬 것이었다. 나는 지금 독학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된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책도 빌려놨다. 그의 삶에서도 분명 배울만한 비밀스런 지혜가 있을 것이다. 


만약 악기도 전혀 다룰 수 없고, 악보도 볼 줄 모르는 네 살짜리 꼬마가 작곡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당장 입으로 아무 멜로디나 흥얼거려서 녹음을 매일 하라고 권하고 싶다. 드럼을 칠 줄 모르면 발을 쿵쿵거리거나 손뼉을 치거나 껌을 짝짝 리듬에 맞게 씹어도 된다. 집안의 온갖 가재도구를 두드려서 소리를 만들어 봐도 된다. 들어서 슬프거나 기쁘거나 기분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뭔가 느낌이 오면 그건 음악이다. 오선지에 내림표(♭)가 6개 붙은, 어려워 보이는 내림사장조(G♭ major) 같이 정형화된 음악만이 고급스럽고 훌륭한 음악이 아니다. 악보 역시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악보에 갇히게 하는 역기능도 있다. 그래서 재즈의 즉흥 연주가 발생하지 않았나.


내가 주로 하고 있는 음악을 예로 들었지만 글쓰기 등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전혀 돈벌이가 되지 않는 브런치에 꾸준히, 그리고 제법 시간을 투자해서(축내서)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브런치 메인에 내 글이 노출되는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약 4만 2천 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잘난 사람, 잘난 글이 넘쳐나는 브런치 메인에 내 글이 걸리다니... 역시 연재를 했기 때문에 해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당장 돈 안된다고, 별 할 말도 없다고 안 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그때(그때가 언젠데? 오긴 와?)를 기다리고 준비만 열심히 하는 사람 A(준비도 열심히 안 하는 사람도 많다)와 부지런히 손과 발과 머리를 써가며 출발선을 넘어 계속 걷는 사람 B는 나중에는 격차가 많이 벌어진다. 그때가 되면 A는 B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역시 B는 재능이 뛰어나. 타고났어. 천재야! 이런 작품을, 이런 성과를 이루어내다니" 


그러면 B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과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요. 단지 당신이 두려워하면서 준비만 하는 동안 나는 어떻게든, 뭐가 되든 시작했고, 시도했고, 계속했어요. 단지 그 차이뿐이에요. 난 천재가 아니랍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지금은 기다릴 때가 아니다. 재능이라는 당신의 애인은 너무 점잖고 예의 바른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다리지 말고 만나러 가라. 가서 말을 걸어보고, 눈을 마주치고, 손도 잡아보라. 그러면 새침데기 같은 당신의 애인은 마음을 조금 열 것이다. 점점 친해지면 이제 같이 수다도 떨고, 산책이나 달리기도 하고, 밥도 먹게 된다. 당신의 무지와 무자격과 무경험은 기회이자 자원이다. 가진 것이 없다고, 재능이 없다고, 여건이 안 된다고 한탄하지 말고 이걸 가지고 대시하라. 당신의 멋진, 그러나 도도하고 새침한 재능이라는 애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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