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들 중 어느 것도 내재적이지 않다'
영화배우 에단 호크의 소설 「완전한 구원」에 나오는 구절이다. 음악을 만드는 나, 낚시하는 나, 글쓰는 나, 귀촌하기를 소망하는 나, 힘없이 월급에 끌려다니는 나... 어떤 내가 진짜 나일까? 내가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들 중 어느 것도 내재적이지 않다면 이런 '나'들이 나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보다 더 다양한 나, 깊은 나, 알 수 없는 나, 종횡무진한 나임을 믿고 싶다.
성과를 내기 위해 한 가지에 몰두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표면적인 성과가 전부가 아닐뿐더러 성과는 독립적인 게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 있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근엄한 아버지는 가끔 김준현의 '고래?' 유머도 해보고, 정숙한 아내는 가끔 등이 깊이 파인 드레스도 입어보고, 모임에서 언제나 듣는 편인 내가 오늘은 일장연설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기에, 각인된 모습이 아니기에.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언제나 어제의 나를 부정하는 방법, 반대로 가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다. 어제의 나로 더 깊이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어제 1시간 연습한 피아노를 오늘 2시간 연습해 볼 수도 있고, 매일 찔끔찔끔 읽던 책을 하루 만에 완독해 보기도 한다. 매일 정해진 코스대로 일정한 거리만 걷는 운동을 오늘은 다리가 저려올 만큼 걸어볼 수도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언제나 새로운 나이다. 어떤 환경과 성과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정체성이 무한한 나이다. 물론 현실 속에서, 생각 속에서, 환경 속에서 우리는 많이 얽매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어느 것도 내재적이지 않은' 무색의 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게 삶의 즐거움을 누리기에 유리하다. 왜 어제의 나를 당연한 나로 생각하고 그 틀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하는가.
너무 이해가 잘 되는 편보다는 다소 이해가 안 가는 편이 신비하고 매력적이다. 자연이 그렇지 아니한가. 나의 색깔을 바꾸어 보고, 나를 확장해 보고, 나를 접었다 폈다, 돌렸다 떨어뜨렸다, 당겼다 놓았다 해보자. 나는 누구인가? 그걸 난들 알겠나? 물체에 자극을 주고 반응을 봐야 그 물체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의 위하여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지? 어디에서 기쁨을 누리고 어디 쯤에서 슬픔에 빠지지?
나는 통계에 잡히는 한 숫자가 아니다. 나는 아주 지극히 고유한 생명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아주 소박한 나이면서도 아주 풍성한 내가 될 수 있도록 매일의 자유로운 나를 만들어 가자.